국립현대미술관 MMCA
✍️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 | 미디어 설치
2018
Client 국립현대미술관 MMCA
Project ✍️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 | 미디어 설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
학예연구사 | 배원정
2018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Deoksugung
Art of the Korean Empire, The Emergence of Modern Art
Curator | Bae Won-jung
2018

작업 소개

본 전시는 미술사적 관점에서 대한제국 시기의 회화, 사진, 공예 등 다양한 미술의 장르를 아우르고, 이것이 어떻게 확산되어 이후의 시대로 연결되는지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실 그간의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는 조선미술전람회가 개최되면서 미술에 큰 변화가 생겼던 1930-40년대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왔고, 1890-1920년대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시기였다. 대한제국 궁중미술이 당시 여타 미술의 경향을 선도하는 가늠자의 역할을 했던 만큼, 이를 실제 작품들을 통해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근대 미술의 본격적 연구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20세기 전반의 미술이 보다 객관적, 입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1부 “제국의 미술”, 2부 “기록과 재현의 새로운 방법, 사진”, 3부 “공예, 산업과 예술의 길로”, 4부 “예술로서의 회화, 예술가로서의 화가”등 4개의 주제로 구성됐다.

고종, 순종시기의 미술은 쇠퇴기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을 토대로 외부의 선진적인 요소들을 가미하여 근대화로 나아가려는 시대의 흔적이다. 장르, 제재, 표현방식 등에 있어 혼성적이고 융합적인 모습이 발견되고, 생경하게까지 보이는 것은 그런 근대화에 대한 모색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한제국의 미술을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모든 환경을 고려하여 객관적인 평가와 재해석을 하였을 때 비로소 근대 시기의 우리 미술을온전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 전시가 우리 근대미술의 뿌리를 밝혀내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글: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대한제국의 미술 도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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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

미디어 기획: 57STUDIO
협력 기획: 그라페스튜디오

기획 및 구성: 이미지
프로그래밍 개발: 홍진훤(그라페스튜디오)
영상 내 텍스트: 황호윤, 조현진
코디네이터, 후반 편집: 안재영
디자인: 물질과 비물질

프로젝트 내용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고종高宗(1852-1919)과 순종純宗(1874-1926) 시기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에 의해 강점이 시작됐던 때로 암흑기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학계의 노력 속에 대한제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 점차 재위치를 찾아가고 있다. 사실 대한제국은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치열한 모색을 하고 있었으며, 고종은 그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어려운 정치적,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한민족이 근대로 나아가는 중요한 기점이었다는 것만큼은 주지할만한 사실이다. 그간 대한제국 시기의 미술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도 역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이지 못했다. 상황적인 불가피성 속에 서구와 일본의 영향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했으며, 이러한 와중에 조선 시대의 유구하고 우수한 미술의 전통마저 급격히 쇠퇴한 것으로 인식돼 왔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 대한제국은 과거 미술의 전통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한편, 여기에 외부의 새로운 요소들을 수혈함으로써 새로운 개량을 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미술과 시각문화에 있어서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은 광범위하게 나타났지만, 다른 어느 곳보다도 고종의 의향을 즉각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반영했던 것은 바로 궁중미술이다. 궁중회화에서 보이는 다양한 표현방식의 변화, 사진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등장과 부상, 이로 인한 시각문화의 변동, 그리고 수공업의 산업공예와 예술공예로의 분화와 전환, 예술가적 화가의 대두 등 일련의 현상들은 대한제국기가 근대 미술의 토대가 놓였던 미술사적으로 매우 유의미한 시대였음을 알려준다. 이번 전시는 대한제국 시기의 회화, 사진, 공예 등 다양한 장르를 총체적으로 아우른 첫 번째 전시로 이후 한국 근대 미술을 체계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기반이 되기를 기대한다.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내 설치 사진

대한제국기의 국가 시각 상징물 제정과 그 의의
미술사학자 | 목수현

2018년 5월 22일 미국 워싱턴 소재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복원을 마치고 개관식을 가졌다. 때마침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공사관 복도에 걸린 대형 태극기 앞에서 방명록에 사인하는 장면이 보도되자, 태극기를 게양하는 방향 및 괘의 위치 등이 논란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국가 상징이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근대국가 성립 이래의 특징이기도 하다.대한민국의 국가 표상인 태극기太極旗는 조선 말인 1880년대에 국기로 제정되어,대한제국기를 지나 국권이 박탈됐던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또는 국권의 숨은 표상으로 남아 있다가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국기로 다시 채택됐기 때문에 그에 쏟아지는 관심이 더욱 남다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국가상징을 채하는 것 자체가 근대 국가의 두드러진 특징 임을 알 수 있다. 서유럽 국가들은 봉건 왕조 시기에는 각 가문의 문장紋章,coats of arms을 중심으로 상징을 활용했으나, 영토와 국민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국가 체제를 세우면서 국민들을 통합하고자 ‘국기’를 제정했다. 이어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서구 국가들이 아시아에까지 교역의 손길을 뻗어온 19세기에 들어 일본, 한국, 중국 등도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춰 나가면서 국가의 대표적인 상징 이미지로 국기를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출처: 대한제국의 미술 도록 (p.54)

전시설치사진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주요 인사들은 근대화의 일환으로서 대표적인 서구의 신식문물인 사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1880년대 한국에 사진관이 설립된 이래로 어진이나 기록화 등 궁중회화의 상당 부분은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사진이 특유의 표현방식과 특징을 갖춘 새로운 장르로서가 아니라 극사실성을 추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법으로서 회화를 보완하거나 혹은 대체하는 차원에서 인식, 수용됐음을 알려준다. 즉 당시의초상사진이 초상화와의 뚜렷한 관련성 속에 회화의 표현방식과 특징을 받아들이면서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또 반대로 특유의 사실성이 회화에 자극을 주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황후의 초상, 가족 초상 등 그간 유교적 관념 아래 등장할 수 없었던 대상이 사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점은 달라진 시대상과 근대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출처: 대한제국의 미술 도록 (p.65)

전시 설치 장면

전시 설치 장면

19세기 중엽 이후 서구에서는 사진과 인쇄기술의 발달로 이미지를 담은 출판물과 신문, 사진, 엽서와 같은 매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매체 속의 이미지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필요한 지식의 확산과 제국의 운영을 위한 정보의 확산, 나아가 엽서, 상품카드 수집과 같은 소소한 취미 생활을 위한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한국에 관한 정보를 취득하기 위한 백과사전적 이미지가 많이 활용됐다면, 점차 제국주의를 향한 이권과 갈등의 충돌이 동아시아 전역에서 더욱 첨예해지면서 정치·경제적 측면,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는 권력자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생성되었다. 대한제국의 수립과 파리만국박람회의 참여, 이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순종의 즉위에서 한일강제병합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모든 장면은 대부분 타자의 손에 의해 생성되어 소비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결정화되고 정형화되어 갔다.

출처: 대한제국의 미술 도록 (p.88)

전시 설치 장면

전시 설치 장면

이화문 또는 오얏꽃 문양 – 국가 상징에서 황실 문장으로
미술사학자 | 목수현

이화문李花紋 또는 한글로 오얏꽃 문양은 태극과 더불어 국가 상징 문양의 하나로 제정되고 활용됐다. 처음에는 1885년에 꽃과 가지가 다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주화에 새겨졌다가, 1892년에 발행된 닷 냥 은화의 앞면에 다섯 잎의 꽃잎마다 3개의 꽃술이 있는 형태로 정돈됐다. 이화문도 초기에는 여러 가지 변형을 거치며 홑꽃 또는 겹꽃으로도 표현됐으나 도안이 정리된 것은 1907-8년경의 일로 보인다. 이화문 또는 오얏꽃 문양은 그 위상에 부침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오얏꽃을 문양으로 만들어 사용한 예가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이 하나의 문양으로 성립된 사실 자체가 근대적인 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조선 왕실의 성씨인 ‘이李’의 뜻에서 가져온 오얏꽃 문양은 1900년에 제정한 「훈장조례」에서그 채택의 의의를 살펴볼 수 있다. 가장 높은 등위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의 다음 등위로 이화대훈장李花大勳章을 제시하면서 이를 나라 문양[國文]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도4 6 따라서 훈장이나우표 등에 활용됐던 오얏꽃 문양은 대한제국기 초기에는 황실뿐 아니라 국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사용됐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대한제국의 미술 도록 (p.56)

나레이션 | 목수현

국가 상징이 왜 나오냐면 외국과 수교를 하게 되면서 이미지를 요구하니까 줬어야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국기를 제정을 한 거고 그 다음에 다른 나라와 교류를 많이 하는데 우리나라는 원래 가문의 문장의 전통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조선 왕실에서이 오얏꽃을 채택한 것은 근대화되는 시기에 영국이나 프랑스나 일본에서 왕실이나 혹은 천안과의 문장을 쓰는 것과 격을 같이 하기 위해서 문장을 제정한 것이라고 보고요. 조선왕실에서는 뭘 가지고 할까 생각하다가 ‘오얏 리(李)’글자로부터 오얏꽃을 채택하게 된 것이 아닌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황실 문장이 아니라국가 상징의 하나로 쓰였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근거는 1900년에 훈 만들면서 훈장에서 채택하는 상징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가운데는 태극을 놓고 태극에서 빛이 뻗어 나가는 네 쪽에 금 자가 그려져 있어요. 그리고 그 빙 둘러서 오얏꽃, 이게 기본적인 포맷인데요. 기본적인 포맷의 태극과 오얏꽃은 같이 가고요.

이런 문양이 들어간 주화를 생산하는 거는 1885년부터 하는데1892년에 단양 은화에 나오는데 닷냥이라고 쓴 위에 다섯 잎의 꽃잎과 꽃술이 그려진 꽃이 명확하게 나오는 거는 제가 찾은 것 중에선 이게 가장 이른시기, 여기에 고종이 테라스 난간에 이렇게서 있는 그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난간에 오얏꽃이 굉장히 확실하게 보이는데 돈덕전이 석조전 지어지기 이전에 외교관들을 접견실로 사용하던 곳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대외적으로 쓰이는 더군다나 양식 건축물에는 황실의 문장을 썼는데 그러나 이것은 황실만을 상징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이럴 때는 의료관들을 불러오는 거기 때문에 대외적인 ‘대한 제국의 이미지로서 역시 사용한거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죠.

1910년은 확실히 이제 경술국치가 일어나면서 국가는 없어진 거니까요. 주권이 있는 국가는 없어진 거고 대한제국 황실 일본의 천왕가 아래에 있는 황족 중의 하나인 이왕과라는 식으로 명확하게 문서로 남아 있어요. ‘이왕가로 한다’ 그 똑같은 상징을 쓰지만 이게 이완과의 상징으로 되는 거죠. 공식적으로. 창덕궁 인정전의 오얏꽃 문양의 구리가 언제 박혔는가에 대해서 문헌상에 정확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사진상의 비교 자료를 볼 때 1902년에 새끼노타다시가 찍은 창덕궁 사진에 인정 전에는 오얏꽃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인정전이라고 보고요. 1907년에 순종이 경운궁으로부터 이어해서 창덕궁을 수리해서 옮겨와서 살게 되거든요.

그리고 나서 확인될 수 있는 사진은 1910년에 경술국치 때 일본에서 이른바이란 병합을 기념해서 창덕궁 사진을 찍어서 내 사진집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오얏꽃이 명확하게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변화의 시기는 아마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1907년에 창덕궁을 수리하면서 황실 문장이라는 개념으로 창덕궁의 주전인, 정전인 인정전의 바가 넣은게 아닐까

이 옆서는 1910년에 한일병합 기념으로 일본에서 만들어서 배포한 것인데요. 엽서 화면에 오른쪽에는 메이지 전황 그리고 그 배경에는 국화꽃이 놓여 있고 왼쪽에는 순종 그리고 그 배경에 오얏꽃이 놓여 있고 그 아래쪽에 조선과 일본이 함께 있는 지도가 있고 그 둘을 아우르는 공작꽃이 펼쳐져 있습니다. 조선과 일본이 합병한 것이 마치 굉장히 경사로운 일인 것처럼 표현이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의 오얏꽃은 더 이상 국가와는 관련이 없는 이왕가의 지금 상징으로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1910년에 경술국치 이후에이 왕가가 되면서 그 이전에 ‘한성미술품공예제작소’라는 걸 만드는데 한성미술품제작소라는 곳이 민간에서 설립한 곳이긴 하지만 황실이 자본금을 굉장히 많이 대고 물건을 만들어 사용하도록 해요. 그래서 거기에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거니까 오야꽃 넣은 은공품이 칠기니 이런 걸 제작을 하는데 운영이 잘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1922년에 일본인에게 넘어가게 되고 ‘조선미술품제작소’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거든요. 그런데 주식회사 형태로 되기 때문에 만들던 물건은 여전히 만들지만 오얏꽃 문양을 넣은 일종의 조선관광기념품을 만들어서 일본인들이 조선을 와서 가져가는 고급한 물건으로 살 수 있는 걸 만들거든요. 그래서 오얏꽃은 1908년 무렵부터 이미 상업화 되기 시작했다는 거죠. 그래서 태극기와 무궁화와 오얏꽃의 운명은 10년을 기점으로 확 갈리는 거죠.

태극과 무궁화는 국가와 여전히 혹은 무궁화는 국토와 민족과 결합된 방식으로 이해가 되고 활용이 됐는데 오얏꽃은 그냥 이왕가과 왕실, 왕실이 쓰는 좋은 물건, 이런 식으로 브랜드가치가 되는 방식으로 태극이나 무궁화하고 오얏꽃이 갈라지는 지점은 뭐냐면 태극기는 나라가 없어졌으니까 못 쓰잖아요. 그런데 조선 국내에서는 못 쓰는데 3.1운동 이런 때만 한 번 나오고 들어가지만 외국에 있는 사람들은 상관없다고 일본의 통치를 안 받으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은 ‘대한인국민회’ 같은 걸 만들 때 태극과 무궁화가 결합된 상징을 써요. 그리고 임시 정부에서도 그걸 써요.

그래서 나중에 대한민국이 됐을 때 그것을 해외 동포나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이 그 문양을 계속 채택을 하니까’이게 사람들에게 제일 친숙하고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거다’ 라고 해서 태극기하고 무궁화가 그대로 채택이 되는데 태극은 의병이라든가 독립운동이라던가 이런 사람들이 국가와 민족의 상징으로 여전히 생각을 해서 그걸 활용을 계속했고 나라가 없는 시기에도 그런데 오얏꽃은 왕실의 문장으로 국한됐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걸 더 이상 국가와 결합해서 생각하지 않게 있는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