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의
그 후에 거기서 6·25전쟁 나는 바람에 폭격을 맞았어. 폭격 맞아가지고 6.25 끝나고 나서는 주로 가회동 집에서 필름을 현상을 하는 거야. 필름을 많이 찍어 오면은 집에서 밤새도록 하면은, 나는 어리니까 “야, 이것 좀 물에다 수세 좀 해놔” 그러면, 맨날 그냥 수세를 도와드리고. 그담에 물이 부족했잖아요, 옛날에. 그걸 가지고 삼청공원을 가는 거야. 시냇물, 흐르는 시냇물 있잖아요. 거기서 필름이랑 인화지들을 수세를 했어요.
기억이 나는게 물은 정지된 데다가 하면 안 되는 거를 내가 봤죠. ‘흐르는 데다 이렇게 하는구나.’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봤는데, 재동초등학교 다닐 땐데, 밤에, 이렇게 사진 필름 현상하고 그러면 밤에 많이 하잖아요? 낮에는 할 수가 없잖아. 밤에 하다가 새벽 좀 눈 붙이고 학교 가면 약간 꾸벅꾸벅, 아, 잠도 오고, 좀 약간 피곤하게 살았지, 어렸을 때부터.
정주하
그래도 영광이시네요. 아버님께서 아드님의 그러한 할 수 있는 거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귀한 필름을 맡기신 거 아닐까요?
임정의
그건 믿음보다도 그건 운명의 장난 같애, 그냥 해야 돼. 어머님이 다 못하니까 옆에서 잠깐잠깐 해드렸지, 내가 전적으로 한 게 아녜요. 나는 어쩌다가 한번.
정주하
44년에 오셔서 서울에서 시작을 이제 막 하신다면 여기가 굉장히 낯선 곳인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진계에 상당히 중요한 일도 하시고 또 많은 기록을 남기실 수 있으셨는지 정말 궁금한 부분이거든요.
임정의
48년도에.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갔는데, 그게 8기 특2반이라고요. 6.25 전에 임관을 받았나 봐. 49년도에, 그때 왜 그러냐하면 이게 엘리트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그런 사람들을 모아야 될 거 아냐. 아버님한테는 주로 기록하고 사진하는 거를 옆에서 많이 요청을 했나 봐요. 6.25 발발한 날이 6월 25일 날, 우리집은 가회동 살았죠. 아버님은 (집에서 )아마, 장교니까, 소위인가 그럴 거야 아마.
그 첫 출근은 비상 연락병이 연락 와 가지고 인제, (전쟁이) 터지니까 비상소집이 됐나 봐요. 그 사람이 중령이었던데 보도실장인가, 보도과장으로 하는 분이, 빨리 가서 신문사 기자들하고 취재하고 오라고 그래 가지고 쓰리코타 타고 문산을 간 거야. 정말 (아버님이 찍은) 사진들 보면 그 부교에서 피난민들 사진 찍으면서, 그걸 다 냉겨 놓은 거야. 인도교는, 한강 인도교는 먼저 폭파됐고, 그담에 한강철교가 또 폭격된 거야, 못 내려오게. 한강 인도교는 먼저 폭파돼서 아버님은 옆에 부교 타고 내려갔는데. 그담에 거기서 사진을 많이 찍었어. 주로 카메라 가지고 다니는데, 카메라 가지고 다니다가 보면은 필름을 찍잖아요. 그러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어디 대구나 대전 내려가고, 대구 내려가고 부산 내려가잖아요, 제일 먼저 하는 게 사진관 하나 접수하는 거예요. 필름을 현상을 해야 될 거 아니야. 필름을 현상 해 가지고 거기서 그걸 또 인화를 쪼그맣게 해요. 그래서 이제 보도자료 만들고 이런 걸 많이 했나 봐. 지금도 그 앨범이 있어요. 그때 1950년 가을에 만든 사진 앨범이요, 붙여가지고 거기다 캡션 다 써 넣은 거. 어, 그것 참, 그런 걸 이렇게 한 걸 보면은 어우, 진짜 대단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