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MMCA
✍️ 김중업 다이얼로그 | 정인하(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2018
Client 국립현대미술관 MMCA
Project ✍️ 김중업 다이얼로그 | 정인하(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제주대학교 본관, Administration Building of Jeju National University, 1965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김중업 다이얼로그
2018.8.20 – 12.16

학예연구사 | 정다영
총괄 프로듀서 | 이성민 (삼삼오오)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Gwacheon)
Kim Chung-up Dialogue
2018.8.20 – 12.16

Curator | Chung Dah-young
Executive Producer | LJSUNGMIN (THREESFIVES)

작업 소개

김중업 다이얼로그 전시의 협력 기획 및 구성을 진행한 삼삼오오 이성민 총괄 프로듀서의 섭외로 전시에 참여하였다. 김중업 아카이브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영상 작품과 함께 작업한 동료 건축가, 작가, 평론가 등을 인터뷰한 시리즈 영상을 전시장에 상영하였다.

김중업의 삶과 예술철학을 다룬 ‘김중업건축론-시적 울림의 세계’를 편찬한 정인하 교수가 김중업의 작품 세계를 말한다.

‘김중업 선생님에게는 (건축이) 아마 삶 그 자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건축을 통해서 본인이 생각하시는 모든 이상과 열정, 비전을 담으시려고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It would have been life itself to him. He seems to have sought to reflect in architecture all his ideals, passion, and vision.’

정인하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Inha Jung (professor of architecture, Hanyang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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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

Executive Producer: LJ SUNGMIN(THREESFIVES)
Coordinator: Cho Hyun Dae
Translator: Kim Yoo-suk
French Proofreading: Yang Jiwon

Film by 57STUDIO
Director: Lee MeeJee
Camera: Production KEZR (Kim Sangil, Kwak JaeMin, Kim SangHyuk, Um JunHo)
Your Photographer (Jun SangJin)
Jang JiNam
Edit/D.I: Lee MeeJee
Music: Jeong JinHwa

Image materials courtesy of the Kim Chung-up Architecture Museum, KBS, Korea TV

프로젝트 내용

《김중업 다이얼로그》전은 한국 현대 건축의 신화적 인물인 건축가 김중업을 조망한다. 하지만 이 전시는 그동안 김중업에 관한 피상적인 진단과 신화화된 측면과는 거리를 두고, 예술과 건축의 관계를 매개로 그동안 논의되지 않았던 다양한 맥락 속에서 작가와 그가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전시다. 김중업의 타계 3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이 전시는 한국 현대 건축 전시를 꾸준히 기획해온 국립현대미술관이 김중업건축박물관과 공동으로 준비했다. 건축가 김중업의 생애 전반을 조망하는 첫 대규모 전시로서, 김중업건축박물관의 소장품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아카이브, 그리고 건물주로부터 대여한 자료들과 사진 및 영상 신작으로 구성했다.

1922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실무를 한 뒤 한국전쟁 이후 초토화된 한국 땅에서 한국적 모더니즘을 구현하고자 한 건축가다. 그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만난 예술가들과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국 문화예술계 중심에서 활동하며 예술가 들을 후원하고, 그들과의 협업을 오랜 기간 진행했다. 한국에서 최초의 건축 전시회를 열기도 한 김중업은 전시라는 문화양식을 일찍부터 이해하고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건축을 건물로 한정하지 않고 담론의 문제로 보고 예술매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진행했다. 그러한 사유의 흔적은 그가 남긴 이미지 아카이브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김중업 다이얼로그》전은 역순으로 진행되는 김중업의 작품 연대기를 첫 번째 대화의 시작으로 연다. 그리고 ‘세계성과 지역성’, ‘예술적 사유와 실천’, ‘도시와 욕망’, ‘기억과 재생’ 등 4개의 주제로 그간 김중업과 그의 작품에 관해 주변부에 머물렀던 문맥들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그간 논의가 부족했던 김중업의 후기 작업들과 한국의 중요한 예술가들과의 협업 과정, 도시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이제 막 촉발되기 시작한 한국 건축가 연구의 출발점으로서 건축, 예술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관계망들과 대화의 장을 여는 단초가 되리라 기대한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전시소개글

우리가 한 건축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한국 근대 건축사라는 측면에서 김중업 선생님이 활발하게 활동하셨던 1950-60년대를 소위 개발연대라고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군사 정권에 의해 지배되던 시기였고,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발전하던 시기였으며 또 지금도 여전하지만 남북이 대치하는 냉전의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건축가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투사시키면서 어떤 선택을 해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김중업 건축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근대 사회로의 전환 시기 속에서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근대 이후의 여러 가지 변화 가운데 건축가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도시화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밀집해 살면서 독특한 삶의 방식이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가들에겐 그런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공간적, 물질적으로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굉장히 중요한 과제였고,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도시화에 대한, 그리고 그 도시화가 발생시킨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어떤 식으로 물질화, 공간화 시킬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그 분들의 역할을 자세히 살펴봐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How should an architect’s life be understood?

As for modern Korean architectural history, the 1950-60s, when Kim was active, can be called the “development decades.” In the ’60s, a military regime was in power politically, the nation grew by leaps and bounds economically, and the Cold War between the two Koreas was underway. In this atmosphere, the architect made choices, projecting his ideas on architecture in ways he wanted. These are very important for understanding his architectural works.

What would have been architects’ role in such a time of change?

Among many changes since the modern age, urbanization was the one that most affected not only architects but also everyone in daily life. As many came to live in concentration in one place, unique ways of life arose. Architects pondered much on how to materialize and spatialize urbanization experienced in Korea and new ways of life arising from it. In that respect, we must examine their role in detail.

우리는 근대를 자생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외부에서 만들어진 것을 타율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늦게 수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식민지를 경험했고 또 내전을 경험했기 때문에 건축가들이 조금 더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김중업 선생님 대에서 처음 본격적으로 근대라는 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건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근대 건축가에게, 특히 한국 건축가에게 주어진 역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근대적 아이덴티티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드러낼 것인가 하는 중요한 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제안들과 생각들이 표출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김중업 선생님께서 특히 조형적인 관점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점이 (선생님께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과 기여를 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공간 개념 체득과 발화라는 차원에서 김중업 주택 작품이 갖는 특징은 무엇이 있을까요?

보통 근대 이후에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사적 공간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이런 공간을 구축하는 데에는 건축가들마다 접근 방식이 달라질 수 있는데요. 가령 공간이 가지는 기존의 질서들,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나 생활관습에서 나타나는 그 위계라든지 이런 것을 중시해서 반영하는 건축가들도 존재하고, 좀 더 우리가 육체로서 느끼고 오랜 시절 경험을 통해, 삶을 통해 체득하는 공간, 이 공간을 좀 더 논리적, 개념적으로 발전시키는 건축가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김중업의 주거 작품은 공간적인 측면에서는 그 분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오랫동안 경험하고 체득했던, 어찌 보면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온풍경이라고 할까요. 의식 속에 잠겨 있는, 굉장히 원초적인 느낌들을 주거 작품 속에서 표현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느냐 하면 공간의 크기, 방과 방 사이의 연결 관계, 전통적인 방의 기능들을 주거 작품 속에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가령 인(人)자집이라든지 아니면 이경호 주택이라든지 설원식 주택이라든지 아니면 이강호 주택 등은 좀 더 실험성이 강했다고 생각해요. 실험성이라는 것은 큰 스케일의 건물에서는 하기 힘든, 주거에서만 가능한 조형적인 측면과 공간적인 측면에서 실험이 이루어진 것인데요. 그 외의 많은 주거 건물들 대부분 또한 체화시킨 경험들, 원초적인 감각들이 좀 더 충실하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Unable independently to achieve modernity, Koreans passively accepted modernity created outside, and that happened very late. Because we underwent colonial rule and a civil war, the conditions were against architects’ stable activities. As a result, the issue of how to embrace modernity and how to express our architecture arose for the first time in Kim’s generation. Various proposals and ideas were presented in that respect, and Kim’s strong interest in plastic aspects was a crucial role and contribution.

What would be the features of housing designed by Kim?

According to many scholars, private space was born in the modern era. Architects can differ in approaches to building such space. Some stress and reflect the existing order in spaces,the hierarchy in people’s ways of life and daily customs. Others develop, more logically and conceptually, spaces that we grasp through prolonged experience and life. Seen thus, spatially, housing designed by Kim was a conceptually unexplainable kind of a landscape he’d experienced and grasped for long after birth and growth. He expressed in the housing he designed very primal feelings submerged in his consciousness. They were ways of expressing in housing design the sizes of spaces, connections between rooms, and functions of rooms in traditional houses. He was more experimental in cases like the lambda-shaped house, Lee Gyeong-ho’s house, Sul Won-sik’s house, Lee Ganghong’s They were plastic and spatial experiments possible only in housing and difficult in big buildings. They more faithfully reflect experiences gainedfrom many other housing projects
and primal sense.

김중업 선생님의 1940년대 초기 일본에서의 활동 혹은 한국에 돌아오신 후의 활동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김중업 선생님은 굉장히 건축가로서 많은 굴곡을 가지신 분이 아닌가 합니다. 이 분의 삶에서 커다란 두 가지 변곡점을 끄집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변곡점은, 잘 아시는 것처럼 1952년부터 르 코르뷔지에 아뜰리에에서 3년 2개월 동안 같이 작업하고 배운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영향은 일생동안 지배적으로 나타났고, 그런 점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 이전의 작품 경향과 이후의 작품 경향은 명확히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작품은 조금은 모호하게 섞여있었습니다. 가령 나카무라 준페이와 같은 요코하마 고공의 선생의 경우는 에꼴 데 보자르식으로 학생들을 교육했고 그래서 보자르 시스템에 의한 건축 경향이 아마 학창시절에는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에꼴 데 보자르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소위 절충주의 건축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학교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이 학교가 했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과거의 양식적인 모티브들을 적절하게 섞어서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 특히 공적 프로그램들에 적절한 설계방식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중업 선생님이 처음에 건축을 배웠을 땐 이러한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설계사무소를 다닐 때는 조금 더 기능적이고 근대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930년대 일본 건축은 이미 근대 건축을 받아들였고 그것의 지배적인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1950년대에 르 코르뷔지에 아뜰리에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이 굉장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가 굉장히 큰 변곡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르 코르뷔지에 사무실을 그만두고 한국에 귀국한 이후에는 주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바탕으로 한국 건축의 지역성을 탐구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하고, 그런 관점에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나 제주대학교 본관, UN 묘지 채플, 정문과 같은 건물들이 이런 영향을 대변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Please tell us about Kim’s activities in Japan in the early 1940s or after return to Korea.

As an architect, Kim underwent many ups and downs. We can point out two big turning points in his life. The first turning point was when he worked and learned at Le Corbusier’s studio for 3 years and 2 months from 1952. This period had a dominant influence all his life and thus was an important turning point. There’s a clear difference in the tendency of his works before and after this period. Before that, the tendency of his works was a bit vaguely mixed. Professor Nakamura Junpei at Yokohama Higher Technical School taught students in the Ecole des Beaux-Arts style, for example. So an architectural tendency according to the Beaux-Arts system would have been important for Kim during his school years. The Ecole des Beaux-Arts is a school that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so-called eclectic architecture from the latter half of the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In particular, one of the important roles played by this school was to mix past stylistic motifs suitably and present design methods suited to various programs demanded by modern society, especially public programs. when he first studied architecture. Working at a Japanese architectural design firm after graduation, he would have been under more functional and modern influence. It’s because modern architecture had already been embracedand began to be dominant in Japan in the 1930s. But as Kim began to work at Le Corbusier’s studio in the 1950s, he came to be very strongly influenced. This period was a very big turning point. After returning from France, he explored the localityof Korean architecture mainly based on Le Corbusier’s architecture. Buildings like the French embassy in Seoul,Administration Building of Jeju National University, and the Memorial Service Hall and the Main Gate of the UN Memorial Cemetery represent such influence.

그 다음에 두 번째 변곡점은 1971년부터 1978년 사이의 반강제적인 해외 추방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 동안 거의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셨고요. 그러면서 나름대로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면서 당시 변화된 현대건축의 흐름을 만나고 그것을 익히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1978년에 귀국하시고 보여주시는 작품들은 그 전과는 변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작품에서 중요하게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가 대단히 근대적인 건축과 한국적인 건축이 분열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가령 삼일로 빌딩이라든지 대단히 기능적인 건물들은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같은 기능주의적인 작품을 보여주고 있고요. 그렇지 않은 건물들은 대단히 지역성이 강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요. 이 두 가지가 어찌 보면 내면에서 분열되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1978년 이후 한국에 귀국해서 다시 한 작품들을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통합을 해보려 노력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가령 육군 박물관, 한국교육개발원 신관을 보면 새로운 조형을 선보이고 있고, 지역성이라는 측면보다는 건축가가 내면에 갖고 있는 원초적인 의식들, 가령 매닐(맨힐?)이나 돌무덤 같은. 뭔가 오랫동안 내재되어 있던 것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내려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창조적인 시기가 오래 가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1983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이후의 시기는 병마와 싸우는 과정에서 초기에 가졌던 창조적인 생각들이 많이 사라졌지 않나 생각합니다. 1978년에 귀국해서 약 4-5년의 기간 동안 펼쳐 보인 세계는 조금 더 다른 차원의 건축세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큰 두개의 변곡점이 존재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다양한 건축적 변화가 생겨난 것이 김중업 선생님의 건축세계가 아닌가 판단하고 있습니다.

The second turning point was his half-forced exile abroad during 1971-78. In this period, he was barely able to work. Staying in France and America, he encountered and studied changed trends in contemporary architecture. Works he presented after returning to the country in 1978 showed changes from earlier ones. One of the important features of his works from the 1960s is a split between very modern buildings and Korean-style ones. For example, very functional buildings like the Samil Building show influence from Mies van der Rohe rather than Le Corbusier.Other buildings show strongly local characteristics. These two seem to have been divided in the architect’s mind. He seems to have tried to combine them, however he could, in the works he designed after returning to the country in 1978. For example, he presented new shapes with the Korea Army Museum and the new annexof the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and seems to have tried to unravel in his own way his primal consciousness, something inherent in him for long like menhirs and stone graves, for example, than focusing on locality. But, unfortunately, such a creative period didn’t last long. I remember it was 1983. After that, battling illness, he seems to have lost many creative ideas of his youth. What he unfolded for around 4-5 years after returning in 1978 was an architectural world on a level different from the earlier one. Seen thus, there were two big turning points and, with them in the center, diverse architectural changes. That was Kim’s architectural world to me.

어릴 적 혹은 태어났던 곳, 고향에서 받았던 내재된 이미지들이 건축가의 작품과 작업에 어떻게 구현이 될까요?

김중업 선생님께서도 사실 보면 르 코르뷔지에 작품의 영향이 강하게 나오기 때문에 간과된 측면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평양에서 그리고 그 이전에 성천이나 북한 평안도 지방에서 성장하시면서 받았던 풍경이라든지, 아니면 그 당시 굉장히 감수성이 풍부했던 시기에 경험했던 것들이 평생 동안 뇌리 속에 담겨져 있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작품에 끄집어내느냐에 대한 고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방식이라든지 드러나는 경향은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내재된 원초적인 경험들이 풍부하게 나온 시기는 오히려 나이가 드신 이후에 좀 더 강해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겠는데요, 아마 젊었을 때는 훨씬 더 아이디어나 현대적인 경향, 조류들, 외부적인 요건들에 강한 영향을 받을 수가 있지만 나이가 드시면서 그런 것들이 좀 더 해체되면서 내면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 경험들, 원초적인 인상들이 좀 더 강하게 드러나지 않나 생각합니다. 후기 작품에서 그런 경향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김중업 선생님의 건축은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어쨌든 김중업 선생님이 사셨던, 주어졌던 여건 속에서 최선의 어떤 방식들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한국성이라는 것이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건축가의 성향이라든지, 투사하고자 하는 생각들이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국성을 이야기할 때 여러 가지 각도에서 정의할 수 있는데, 가령 김중업 선생님이 조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면, 김수근 선생님은 공간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타미 준이나 이런 분들처럼 좀 더 물성이나 재료의 촉각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도 있고요. 그래서 어떤 건축가들의 성향, 자기를 둘러싼 여건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성향에 따라서 그런 방식은 차이가 나고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중업 선생님께서는 어쨌든 특히 지붕이 가지는 조형성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현대적인 재료로, 노출 콘크리트나 유리나 철과 같은 현대적인 자료를 가지고 과거의 조형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 문제가 (선생님이 탐구하신) 중요한 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It’s intriguing that images harbored as a child should appear in the architect’s work.

Though it’s been overlooked due to Le Corbusier’s strong influence on his Kim’s works, the landscape he saw in Pyongyang and, earlier, in his childhood, in Songchon County and Pyongan Province in what’s North Korea now or what he experienced in the period, when he was very impressionable, lay in his mind all his life, and he would have pondered on how to interpret and reflect it in his buildings.In my view, primal experiences inherent in him burst out more richly and powerfully when he was older. I don’t know why. In youth, you can be affected far more stronglyby ideas, contemporary tendencies, trends, external conditions. In my view, such things dissolved a bit more as Kim aged, and ideas, experiences, and primal impressions inside manifested themselves more strongly. Such a tendency is characteristic of his later works.

Can Kim’s architecture be called “Korean”?

In my view, something called “Koreanness” arose in the process through which Kim derived the best methods under the given conditions of his life. In that process, the architect’s dispositionor the ideas he wished to project came into play. We can define “Koreanness” from diverse angles. For example, if Kim stressed plastic aspects, Kim Swoo Geun focused on spatial aspects. Others like Itami Jun talk more of materiality or materials’ textures and tactility. So such methods can differ and change according to an architect’s disposition,or the disposition that manifests itself under the surrounding conditions. Kim was especially interested in the plasticity of roofs, and the issue of expressing plasticity from the past with contemporary materials like exposed concrete, glass, steel was an important topic.

김중업 선생님 이후에 현대 건축가들이 생각하는 전통에 대한 문제는 우리 현대 건축의 담론과 깊게 연관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건축의 담론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풍경, 랜드스케이프(Landscap)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한국 현대미술관이라든지 광주에 있는 광주 아시아문화의 전당이라든지, 노들섬이라든지 최근의 작품들을 보면 도시 풍경을 조직하는 방식이 굉장히 독특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서양에서 이야기하는 랜드스케이프 개념과는 다르게, 서양의 랜드스케이프 개념은 주체에 의해서 해석되는 자연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는데 비해, 한국의 자연은 훨씬 더 다양한 주체들과 시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들이 소쇄원이나 전통적인 조경 작품들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건물에서 한 명의 주체에 의해서 해석되는 풍경이 아니라 다양한 사연들, 방문객들, 주민들이 참여해서 그 사람들 각각의 시각에서 풍경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들이 좀 더 한국적인 특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랜드스케이프를 해석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특징들이 나타나는데, 한국의 현대 건축가들, 특히 중요한 공공건축물을 설계했던 건축가들은 풍경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 대단히 한국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김중업 선생님은 스스로를 고전주의자라고 한번 이야기 하신 적이 있었어요.

고전을 이해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데, 제가 해석하는 방식을 말씀드리면, 고전은 어떤 하나의 과거 원형을 갖고 있는, 좀 더 폐쇄된 사유체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의 의미는 추구해야 할 가치와 이상을 갖고 있다는 거고요. 따라야 될 모델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파르테논이든지 롱샹 성당이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시각 자체가 따라야 될 이상적인, 고전적인 모형을 머릿속에 넣고서 그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고전주의라고 간주하는데요, 그렇게 본다면 김중업 선생님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근대 건축이라는, 과거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모형을 충실하게 따르고 변형시켜왔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김중업 선생님께서 본인을 고전주의자다, 이렇게 부르셨지 않나 추측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분이 고전주의다 하면 흔히 할 수 있는 칼럼, 페디먼트(pediment)라던지 장식적인 모티브를 써야만 고전주의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 근대를 수용하는 관점에서 동아시아 근대 건축가들 대부분이 가졌던 숙명적인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Since Kim, the issue of tradition as seen by architects today has been deeply linked to contemporary architectural discourse in the nation. The most important part of contemporary architectural discourse is the landscape in my view. Recent works like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Asia Culture Center in Gwangju, and Nodeul Island, for example show very unique ways of organizing urban landscapes. In the West, the viewpoint is that the subject interprets nature. In contrary, nature in Korea allows participation by a far greater variety of subjects and perspectives. You characteristically find such things in the Soswaewon garden and other traditional landscapes, where landscapes aren’t interpreted by one subject from a building but there’s room for participation by diverse people, visitors, residents and interpretation from their respective viewpoints. These are the more “Korean” features. Disparate features arise because of disparate ways of interpreting and grasping nature. Contemporary South Korean architects,especially those who’ve designed important public buildings, show very Korean characteristics in how they interpret landscapes.

Kim even called himself a “classicist” once, didn’t he?

There are many ways to understand classics. According to my interpretation, a classic constitutes a more closed thought system with a certain, past archetype. It means there are values and ideals to be pursued. There’s a model that must be followed.It’s unimportant whether the Parthenon or Notre-Dame du Haut in Ronchamp is the model. Seen thus, in the process of Kim’s birth and growth, it was a process of faithfully following and modifying modern architecture, a model created by someone in the past. He seems to have called himself a “classicist” in that respect.But I don’t think you’re a classicist only when you use commonly available ornamental motifs like columns and pediments
That seems to have been the fate of most modern East Asian architects
in the process of accepting modernity.

건축가 김중업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묻고 싶습니다.

김중업 선생님이 만들어낸 영향은 좀 더 다층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직접적으로는 건축 형태적인 측면에서 눈에 보이는 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제가 보기에는, 저도 사실은 김중업 선생님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관찰해온 입장이지만, 지금 새롭게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특히 어느 부분이냐 하면, 그 분의 건축에 나타나는 공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하는데요. 과거에는 공간이라고 하면 내부공간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외부와 내부가 통합된 관점, 그러니까 랜드스케이프(Landscape)이라는, 풍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김중업 선생님의 공간 개념은 좀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지금의 현대 건축가들에게 또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한 건축가를 해석하고, 그 해석이 하나의 시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시기에 계속적으로 이뤄지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 이런 것이 그 건축가를 풍부하게 만들고 또 더 나아가서 한국의 건축계를 풍부하게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중업 선생님 작품들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작품들을 설계하셨는데요. 그 설계된 작품들이 프로그램에 따라서, 기능에 따라서 유형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어떤 프로그램 같은 경우에는 이제 과도한 조형적인 시도를 하는데, 그런 시도적인 부분들은 비교적 기능적으로 접근해나갔다고 생각해요. 대표적으로 오피스 빌딩이라든지 아니면 몇 개의 대학교 건물들이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중업 선생님의 기술적인 기여에 관해 말씀을 드리자면 오피스 빌딩에서 주로 그런 부분이 나타나는데요. 삼일로 빌딩 같은 경우는 한국에서 최초로 철로 된 커튼 월(curtain wall)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철골 구조는 그 이전에도 지어졌는데요, 소위 미스 식의 유리로 된 마천루의 형태를 한국에서 완벽한 실현한 최초의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건물이 한국의 고도성장을 상징하는 건물로 한동안 소개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들이 김중업 선생님이 했던 중요한 기술적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최초로 지어질 때 이름인 도큐 호텔 같은 것을 보면 사실 시공과정에서 그 아이디어가 충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기술적인 측면, 구조가 가진 구축적인 측면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오피스 빌딩들은 당시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기술적인 발전에 기여를 했다고 판단합니다.

Shall we discuss architect Kim’s legacy in South Korean architecture today?

Kim’s influence must be understood from a more multilayered perspective. First and directly, a visible relation is formed in terms of architectural forms. Though I’ve studied and examined Kim for long, I have new perspectives now, too. It’s especially true of the understanding of space in his buildings. In the past, space only meant interior space. But, now, the viewpoint is to combine the exterior and the interior. So, from the perspective of landscapes, his concept of space must be expanded further. Such things can influence architects today, too. Interpretations of an architect don’t stop in a certain era but are continued in other eras, too, thus leading to new interpretations. Such things can enrich that architect and South Korean architecture, too. Kim designed very diverse kinds of buildings They can be classified into types by program and function. But, with some programs, it’s hard to make bold plastic attempts. In such cases, he took comparatively functional approaches. Representative are office buildings and some college buildings. His technical contributions show mainly in office buildings. With the Samil Building, he used a steel curtain wall for the first time in South Korea. Of course, steel frame buildings were built even earlier. But this was the first perfect realization of the Mies-style glass skyscraper in the nation. That’s why the building was introduced for some time as one symbolic of the country’s fast economic growth. Such were his important technical contributions. The design for the Tokyu Hotel showed a strong tendency to stress the structure’s technical, constructive aspects though the idea couldn’t be fully realized during construction.

건축물을 보존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간이 지나면 건물은 하나의 보존의 문제로 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존은 설계적인 의도하고는 또 다른 논리를 갖기 때문에, 이게 맞다 저게 맞다 단정하기는 힘든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보존의 원칙은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가령 재료라든지, 과거의 시공방식을 재현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은 어쩔 수 없이 현대적인 방식을 도입할 수밖에 없지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맨 먼저 만들어졌을 때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보통 건축 역사가들이 역사를 쓰다 보면 일종의 선택과정을 거칩니다. 모든 지어진 건물들을 기술할 수는 없고요. 어떤 한정된 숫자의 건물만을 기술하는데, 건축 역사가들에게 아니면 건축 이론가들에게 관심을 끄는 건물은 두 가지 정도의 기준에 의해서 정해지는데요. 첫 번째는 그 건물이 건축가가 살았던 시대를 상징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가령 우리가 서울시청이라든지 한국은행 본점 옛 건물 같은 경우를 보존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뭐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일제강점기라는 시기를 거쳤고 그 시기를 나름대로 대변하고 설명할 수 있는 건축이 그 건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삼일로 빌딩이나 아니면 김중업 선생님이 설계했던 몇 가지 건물들은 개발연대의 중요한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고,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기준이라면, 두 번째 기준은 건축 자체가 가지는 자율적인 논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건물 자체의 이후 발전과정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선례라고 해야 되나요. 현재의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건물을 설명해야지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반드시 중요하다고 꼽고 있고요. 이 두 가지 요건을 다 충족시키면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고 나아가서는 문화재까지도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What should we do with the tangible and intangible value left with buildings?

With buildings, you move on to the issue of preservation as time passes. But because preservation differs from design intentions in logic, it’s hard to say conclusively what’s right or wrong. In my view, the best principle of preservation is to preserve and maintain the original forms maximally. But that’s very difficult to do in reality. You inevitably have to introduce contemporary methods into such aspects because you often can’t reproduce materials or past construction methods.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o preserve wholly the original forms at the time of their construction. Generally, when writing history, architectural historians make certain choices. They can’t describe all buildings that have been built. They only describe a limited number of buildings.Buildings that interest architectural historians or theorists can be classified according to two criteria. The first is whether a building can symbolically represent the era that the architect lived in. For example, we try to preserve cases like the Seoul City Hall and the old building of the head office of the Bank of Korea. They are buildings that can represent and explain the Japanese colonial era underwent by Korea. So the Samil Building and several buildings designed by Kim show and represent important aspects of the development decades.The second criterion is architecture’s autonomous logic. It can be an aesthetic one, too.Anyway, there are cases where you must explain a particular building in order to explain today’s architecture,an important precedent for explaining the subsequent development of buildings themselves.In that case, the building is cited as crucial. If both conditions are met, a building is worth preserving and can even become cultural heritage.

건축가 김중업에게 건축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김중업 선생님에게는 (건축이) 아마 삶 그 자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건축을 통해서 본인이 생각하시는 모든 이상과 열정, 비전을 담으시려고 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그 분이 설계했던 작품을 관찰하고 밖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단순한 물질이나 구조를 넘어 깊은 울림을 받아요. 그 울림이 오랫동안 이 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좋아하게 만드는 끌림이죠.

What would architecture have meant to Kim as an architect?

It would have been life itself to him. He seems to have sought to reflect in architecture all his ideals, passion, and vision. Examining from outside the works he designed, I get a deep echo beyond simple materials or structures. That reverberation is allure that has made me take interest in and like him for a long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