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 LEEUM
인간, 일곱 개의 질문 - [Questions] 조한혜정(문화인류학자)
2021
Client 리움미술관 LEEUM
Project 인간, 일곱 개의 질문 - [Questions] 조한혜정(문화인류학자)

리움미술관
인간, 일곱 개의 질문 –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들’ 인터뷰 시리즈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
2021

LEEUM
Human, 7 question – “What is Human?”
‘Questions’ Interview series
Cho Haejoang (Cultural Anthropologist)
2021

크레딧 보기

기획 | 리움미술관
김태연 책임연구원 (Education and Public Programs)

구성 및 편집 | 57STUDIO

촬영팀 | 정재하, 김태우, 양용진
/ 엄준호, 이규연, 강원모

드로잉 | cucurucu
번역 | Ben Jackson

작업 소개

세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교수입니다. 코로나 이후 기존 가치들이 붕괴된 상황에서, 조한혜정 교수는 남성 중심적으로 연구되어왔던 휴머니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녀는 포스트모던과 포스트휴먼 시대에 앞으로 연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하며, 인간다움의 특징으로 언급되는 공감과 보살핌이 그동안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돌봄’의 범주에 속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조한혜정 교수의 이러한 사유를 함께 나눕니다.

The third interview features cultural anthropologist Professor Hye-jeong Cho. In the wake of the collapse of traditional values following the COVID-19 pandemic, Professor Cho raises questions about the male-centric perspective that has dominated humanism. She discusses the direction future research should take in the postmodern and posthuman era, highlighting that empathy and care, often cited as essential human traits, belong to the domain of “care,” which has traditionally been regarded as part of the female sphere. This interview shares Professor Cho’s reflections on these ideas.

프로젝트 내용

《인간, 일곱 개의 질문》展과 연계한 6개의 인터뷰 시리즈.
인간이란 무엇인지, 코로나 팬데믹과 인류세를 마주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국내외 석학과 참여 작가들에게 묻고 그들의 통찰을 들어본다.

출처 : 리움미술관

원자화된 개인들이 사회적 탯줄을 갖고 태어난 존재인데 ‘사회적 탯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것이 우리 과제인 거죠. 우린 다 연결된 존재다, 만물은 다 연결되어 있다. 착하면 다 호구가 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건가. 어떻게 서로 돌보고, 만물이 서로 돕는 그런 상태로 갈 것인지가. 우리한테 남아 있는 과제인 거죠, 우리가 해내야 되는 과제인 거죠.

–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지금 우리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일까요?

저희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사실은 굉장히 충격을 받고. 그간에 이대로는 아니라는 생각들을 하면서도 계속 질주하는 쾌속 열차에 몸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강제적으로 이렇게 (시간을 갖게) 되면서 생각들을 많이 하고 좋은 질문들을 많이 던졌었거든요. 학교는 뭐냐, 가족이 뭐지, 국가란 무엇인가. 기본소득 논의까지 하게 됐는데. 저는 약간 방법론적으로 우리가 결국에는 포스트모던 해야 된다. 지금 우리가 탄 막 달리는 열차가 어떤 모던한 체계잖아요. 합리성의 과학 기술이 지배하는 거기서부터 벗어나서 완전히 다른 시스템으로 우리가 가야 되는데. 그것이 누구며, 그것을 해내는 사람은 누굴 것이냐 질문을 해야 되는 것이거든요. 저는 포스트모던의 주역은 누구였나, 포스트휴먼의 ‘휴먼’은 도대체 누군가. 그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던지고 있는 편이에요.

The circumstances of the COVID-19 pandemic have come as a big shock for us all. Until then, we had all been hurtling along on an express train even though we knew we couldn’t go on that way. Having so much time forced upon us like this has made us think and ask a lot of good questions. What do school, family and the state actually mean? We’ve even talked about universal basic income. I think, in terms of theory and methodology, we need to be post-modern, The speeding train we’re all on now is the modern system. We need to leave that system, which is dominated by the science and technology of instrumental rationality and move to a totally different system. What we need to ask is: Who will transform the system? I ask rather more specific questions: What is the “modern” when we talk about “post-modern”? Who is the “human” when we talk about “post-human”?

그렇다면 포스트휴먼에서 휴먼은 누구인가요?

저희가 지금 알고 있는 인간중심주의 내지는 인간을 예외로 보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이룩한 근대를 해체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좀 더 나가서 포스트휴먼(입니다) 인간도 그냥 하나의 동물이고 다른 존재들, 나중에 기계까지를 포함한 존재들 속에서 같이 살아가야 되는 존재다 이런 얘긴데. 저는 이 논의가 굉장히 중요하고 그중에서도 제가 지금 주목을 하는 지점은 포스트휴먼의 ‘휴먼’이 너무나 남자 중심이었지 않나 (그간이) 남성성의 역사였다면 구체적으로 포스트휴먼의 시대를 만들어 갈 사람은 여성성을 가진 사람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간 주역으로서 활동하지 못했던 배제되고 주변화된 존재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So who is the “human” in “post-human”? 

The post-modernism that we know deconstructs anthropocentrism, or the modernity built on the idea that humans are exceptional “masters of creation.” Post-humanism is a step beyond post-modernism. Post-humanism says that humans are just living creatures and must live together with other beings, and, later, with artificially intelligent machines. I think this is a very important discussion. What I’m currently focusing on now is that the “human” in “post-human” generally refers to the male human. If history [until now] has been that of patriarchy and masculinity, it’s highly likely that the agents who shape the post-human era will be more egalitarian and feminine. I think they will be people who have until now been excluded and marginalized and not played leading roles in society.

원래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호모사피엔스의 가장 사피엔스적인 것은 태어나서 한 삼 년 동안은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존재라는 거예요. 그럼 그 무력한 존재를 돌보는 그 과정에서 ‘인간됨’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어떤 특성이 자라는 거죠. 그것을 ‘인간다움’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통이고 아이가 울면 젖을 주고 그 아이는 이렇게 하면 엄마가 젖을 주더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굉장히 독특한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그 3년 동안 의존성의 과정에서 우리가 개발하게 된 공감의 능력, 소통의 능력, 보살핌의 능력이 있고 그 보살핌과 소통이란 것이 항상 더 능력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쌍방적인 능력이라고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죠.

One of the most central characteristics of humans, the most sapiens-esque aspect of Homo sapiens, is the way infants are born helpless, unable to do anything for their first three years or more. The process of caring for such helpless creatures  is a key part of the evolution of Homo sapiens. Caring for helpless and vulnerable babies shapes the core characteristics of humans. It’s what you could call “human-ness.” It’s all about communication. If a baby cries, her/his mother feeds her/him, so s/he learns what to do in order to get fed. In this process, a truly unique being is created. What we now know is that the abilities of empathy, communication and caring developed in our early years of dependency are the essence of humanness. A crucial point here is that caring and communication are basically egalitarian not hierarchical. There is no winner or loser: just mutual interaction.

교수님이 강조하시는 ‘돌봄의 감각’이 홍성욱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포스트휴먼적 감수성’과 많은 부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예. 그런데 우리가 다시 코로나 사태 이후에 포스트휴먼을 얘기할 때는 그 포스트휴먼을 향해 가는 도구적이고 질주하고 성찰적이지 않은 인간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저를 포함해서 다수의 이른바 사회적 성공한 여자들은 거의 남성적인, 명예 남자들이거든요 사실 돌봄의 능력을 별로 갖고 있지 못해요 못 키운 것이죠. 못 키워야지만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돌봄의 영역을 풍성하게 갖고 있는 돌봄 교사라던가, 간병사라던가, 요양보호사라던가 이런 분들이 지금 가장 저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그 지점에 대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새겨 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본적으로 그 영역을 보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제가 요새 포스트휴먼(포스트 남성적 휴먼)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고민하는 지점입니다.

Yes. When we discuss post-humanism after the COVID-19 pandemic,  we need to move beyond instrumental, hurried, thoughtless human centeredness. Many so-called socially successful women, myself included, are quite masculine, a kind of “honorary men.” They don’t actually possess a great capacity for caring. They haven’t cultivated that capacity as they have been struggling to survive in men’s world of instrumentality. On the other hand, those who have great capacities for caring, like caregivers in education, health, and geriatric nursing, are currently our most underpaid laborers, even though they are the most essential workers. We need to reevaluate the sphere of human reproduction, which has been regarded as inferior to that of material production. The colonization of women’s sphere of co-loving by men’s sphere of competitive hierarchy needs to be examined. So I talk about the “post-male-human” era instead of simply the “post-human” era.

지금의 길은 다시 원자화된 개인들이 어떤 면에서 사회적 탯줄을 갖고 태어난 존재인데 ‘사회적 탯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것이 우리 과제인 거죠 그런 맥락에서 우린 다 연결된 존재다. 만물은 다 연결되어 있다. 사실은 그간에는 경쟁 사회란 만물은 모두 적대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저희 청소년센터에서도 아이들한테 서로 배려하고 공생하자 이렇게 얘기했더니 학생이 ‘누구를 호구로 만들려고 그러는 거예요’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착하면 다 호구가 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 건가사실은 그것이 지금 너무나 시급한 우리 인류가 해내야 되는 과제인 것이고. 그럴 때 만물이 서로 적대하는 질서를 어떻게 서로 돌보고 만물이 서로 돕는 그런 상태로 갈 것인지가 우리한테 남아 있는 과제인 거죠.우리가 해내야 되는 과제인 거죠.

We need to find ways to be interconnected social beings rather than isolated individuals. Babies are born with an umbilical connection to their mother. We need to figure out how to restore the “social umbilical cord.” We need to realize that all things are connected. We need to enhance a sense of interdependence and coexistence, rather than one of independence and monopoly. Until now, our society has taught us that we must be competitive and mutually hostile. I heard recently that when a teacher told a student to try to be cooperative with others, to be considerate and caring, he instantly said, “Are you trying to make me into a pushover?” We live in a time where kindness is seen as feeble and weak. How can we create a society where kindness is powerful? That’s the question that we who live in post-modern and post-male- human world will have to answer, and it’s a very urgent one for our survival as a species. The key questions are: How can we move away from a civilization built on mutual hostility? How can we build a world based on
care and communication? These are the questions we should ask in this era of great evolutionary shift.

관람객들이 어떤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전시를 보면 좋을까요?

자아성찰? 지금 제가 문제를 제기한 이 돌봄의 영역은 상당히 복잡미묘한 주제인데 저를 포함해서 지금 시대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다 사냥꾼적인 사람들이거든요. 그것(인간예외주의)을 해체하는 작업을 지금 열심히 하는데 그것(남성-인간중심주의)을 넘어서서 정말 서로를 돌보는 사회에 대한 감각을 깨우는 작품들은 언제 나올까 실제로 돌봄을 한다고 얘기할 때는 어떤 대상을 지배하지 않으면서 주체화시키는 능력이거든요.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있고 결국엔 둘이서 같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가는 그래서 제가 그것을 사회적 모성 그리고 사회적 영성이라는 단어로 쓰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가 회복해야 되는 것은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고 성과를 내야 되는 것만 진실이고 끊임없이 통계로 나와야 되고 선명한 이론으로 나와야 되고 이런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Self-reflection, I would say. The issue of care-giving that I’ve raised  is a very complex one.ㅠ Those who have survived in this era, including me, are socialized as hunters and predators. Many artworks here carry messages of “post-humanism.” They deconstruct humanism, but have not yet constructed something else. I did not encounter any piece addressing the question of how to overcome the “male human” era and recover the world of reproductive caring. When we talk about childcare, we mean the ability to let a child grow up without dominating her/him. Caring is constant communication and engagement. Caring creates a world of reciprocity where everything is connected and helpful as part of a long term cycle. I describe this ability using terms such as “social motherhood” and “social spirituality.” We need to get away from the obsessive idea that truth should be proved by only statistics and material evidence. There should be a place for subjectivity or inter-subjectivity. The modern world has been created by a group of great men removed from everyday life. They were armed with statistics and macro-theories, yet disconnected from real life.

우리가 어떻게 애매모호하고, 말을 붙일 수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고 말은 굉장히 분명하잖아요. 근데 말로 할 수 없는 것들 비언어적인 어떤 진실 그것이 사실은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는 이유잖아요. 이것이 미술관이 잘 되어야 하는 이유고 미술가들이 존경받는 이유인 것인데 어떤 비언어적인 진실들이 미술관에서도 꽃피고 실제로 모든 영역에서, 삶에서 하나의 의례로 일상에서 꽃필 수 있는 그런 시대로 가야 된다는 거죠.

In order to restore this wounded world, we need to accept that its systems of communication have collapsed.   Words simplify and distort reality. Art is born to resist simplification. Art tries to express things that can’t be expressed in words, and reveal non linguistic truths. That’s why we love to visit museums and galleries. and why artists are highly respected. We need to steer ourselves towards an age in which more non-linguistic truths are told and heard as forms of art in galleries and in everyday life,
blossoming as a kind of communal ritual prayer of joy and sorr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