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MMCA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 | 참여작가 인터뷰 #2 우종덕
2023
Client 국립현대미술관 MMCA
Project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 | 참여작가 인터뷰 #2 우종덕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
참여작가 인터뷰 #2
프로그래머: 송초롱
참여작가: 우종덕
패널: 신기운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Gwacheon)
Merry Mix: The More, The Better
Artist Interview #2
Programmer: Song Chorong
Artist: WOO Jongduk
Panel: SHIN Kiw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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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

감독: 57STUDIO
촬영: 황낙원, 강주희
촬영보: 안재원, 오유찬

작업 소개

57STUDIO는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 콘텐츠로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 아티스트 인터뷰 기획과 제작을 진행하였습니다.

@mmcakorea
전시가 종료된 이후에 영상 작업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그리고 어떻게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한 이번 프로젝트는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 전시 종료 이후, 참여작가 3인의 작업을 새롭게 기록하고자 시작되었습니다. 대면, 비대면 그리고 AI 기술을 사용한 각기 다른 세 가지 컨셉 안에서 매주 순차적으로 참여작가 3인의 작품 해설 영상이 공개됩니다.

그 두 번째 주인공은 우종덕 작가입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비대면 방식을 통해 뉴욕에 있는 신기운 작가와 서울에 있는 우종덕 작가를 연결합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에게 백남준과 <다다익선>은 어떤 의미일지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만나보세요.

프로젝트 내용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은 오랫동안 꺼져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의 대표 소장품,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을 대대적으로 복원해 다시 켜는 것을 기념한 전시이다. 1988년 9월 15일 백남준은 국립현대미술관에 모니터 1,003대를 이용한 대규모 영상설치 작품 ‹다다익선›을 완공했다. 전시는 ‹다다익선›의 제작 배경과 그 이후 현재까지 작품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아카이브, 그의 작품세계와 관련 자료를 새롭게 해석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Merry Mix: The More, The Better is an archival exhibition commemorating the reactiva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MMCA)’s greatest collection, The More, The Better (1988), following its extensive period of restoration. PAIK Namjune completed this large-scale video installation of 1003 TV monitors on September 15th, 1988. The exhibition will take on a journey across the background of its creative production, an archive accumulated in the process of operating the work since its conception, and the works of different artists who interpreted PAlK’s oeuvre into their own words.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소개글

WOO Jongduk, The More, The Better

신기운: 안녕하세요 우종덕 작가님 이렇게 멀리서 가까운 거리지만 또 먼 거리에서 만나게 돼서 아주 흥분되고 반갑습니다.

우종덕: 저도 반갑습니다. 아침에 여기 오면서 저도 잠깐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백남준 선생님이 84년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위성 중계로 엮으면서 우리나라에 굉장히 많이 알려지고 있고 저도 그때 처음 알았었는데 그때는 굉장히 힘들고 그랬던 작업들을 지금은 아주 간단하게 컴퓨터와 인터넷의 도움으로 이렇게 뉴욕에 계신 분을 여기서 볼 수 있는 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놀라운 일이기도 하고요. 지금은 너무 일상이 되어버려서요. 그런 거 있는데 오히려 더 반가운 것 같습니다. 여기서 뵀을 때보다 멀리 계시다는 걸 생각하고 하니까 엄청 의미 있는 만남인 거죠.

신기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정말 어릴 때 KBS 방송에서 봤을 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는데 지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거고 지금 그걸 이용해서 이 인터뷰가 진행된다는 게 정말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종덕: 백남준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그분이 70년대에 말씀하셨던 게 Information Superhighway라는 게 있었거든요.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이게 도대체 어떤 이야기일까라고 했는데 90년대에 들어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서로 정보와 영상들을 주고받게 되면서 미래의 인터넷을 이미 그때 예견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끔 인터넷 쓸 때 그런 생각들을 자주 하게 됩니다.

신기운: 오늘 만나게 된 이유가 다다익선을 관련돼서 작업도 하셨고 저도 이제 복원 작업의 일종의 기술 자문과 관련된 어떤 일들을 하면서 한 2년여가 넘는 시간을 제가 고민하면서 지냈습니다. 작가님도 관련된 작업을 또 하셨었고요. 그래서 한동안은 다다익선 작업이 잘 돌아갈 것 같지만
또 지나온 역사대로 또 닥칠 어떤 고민들 그런 것들을 작업으로 해 놓으셨는데 작업에서 못하신 어떤 아쉬운 이야기들이 있으면 부탁드릴게요.

우종덕: 지금 옛날에 만들어 놨던 작업이 보존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계속해서 그때에 맞는 기술로 업데이트 되거나 그때에 많은 여러 사람들이 참여 되면서 작품이 새로운 동시대성을 가지면서 계속 살아 나간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백남준 선생님을 설명하는 많은 사람들이 작가이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들을 이렇게 끌어모으는 그런 역할을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백남준 선생님이 했던 작업 자체도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걸 작업 안에서 그때는 보존, 복원이 완료되기 한참 전이었거든요.작업 안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굉장히 아쉬웠지 만 사실은 그게 백남준 작업이 가진 굉장한 특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점을 작업에서 못한 게 좀 아쉬웠습니다.

신기운: 그리고 이제 백남준 선생님은 떠나셨지만 남아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분들은 같이 만들었던 같은 제작자였던 거고 그리고 같이 기록돼야 되는 사람들이었던 것 작품은 남겠지만 같이 기록에 남아야 될 분들이었던 거더라고요. 저희는 작품을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 기록이 이루어지면 백남준 선생을 비롯한 또 같이 만드는 데 참여한 수많은 분들이 같이 기록됐었어야 되는 거라는 걸 제가 놓쳤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어요.

우종덕: 계속 다다익선을 작품으로서 바라보게 되니까 어떤 모뉴먼트나 아니면 우리나라의 궁전, 탑 아니면 그런 거대한 건축물을 보는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었거든요. 그런 걸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이거는 도대체 누가 용접을 해서 올렸을까 아니면 누가 이 텔레비전을 여기에 하나하나 집어넣었을까 뒤에 연결선들을 보면 케이블 타이 같은 것들이 묶여있는데 이건 다 누가 했을까란 생각들을 많이 한 적도 있었거든요 그런 것까지 포함한다면다다익선 을 만드는데 참여했던 사람들 구조 설계를 했던 분들, TV 설계를 했던 분들 그리고 거기에 여러 가지 일들을 했던 사람들이 다 하나하나가 그렇죠 기록으로 남았어야 하고 그런 것들이 작품에 대한 어떤 풍성한 맥락 정보들을 많이 줄 수가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저도 많이 했기 때문에 교수님 말씀에 정말 공감합니다.

신기운: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많은 작업들, 현시대의 작업들도 과거가 된다는 것을 많이 더 체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요새
현업 작가로 열심히 활동할 때의 장비들, 제 작품들이 요새 틀을 때 아니면 요새 다시 작동 시킬 때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백남준 작업의 그것과 같이 겹쳐지는 거예요. 그래서 기술과 미래를 내다보는 작업이 얼마나 큰 부담을 안고, 해야 되는 작업인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전, 선생님은 어떠세요?

우종덕: 어느 때부터인가 예술에 기술이라는 분야가 들어오게 되고 기술은 과학의 산물이니까 필연적으로 계속 발전을 하게 되니까
그리고 요즘 같은 기술은 점점 더 후퇴하고 옛날에 미디어 아트가 이제 올드 미디어가 되고 뉴 미디어 아트가 되고 그런 것들을 볼 때 기기들의 물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이 아직 사람들 마음속에서, 작가들 마음속에서 특히 그거를 소용하는 관람객들 마음속에서 모아버리기가 쉽지는 않은 주제인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백남준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가끔씩 자주 생각나는 말이 있는데요. 미래에 살아남을 예술은 무게가 없는 형태일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거든요. 무게가 없는 예술은 빛밖에는 없거든요. 그래서 아마 영상작업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빛으로 존재한다면 그게 데이터의 형태로 존재할 가능성이 100%인 거니까 그것까지 염두에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가끔 들 때가 있습니다.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릴 게 있습니다. 2년간의 복원 현장 중에 참여해 보시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신기운: 저도 이 TV 컴포짓 단자나 RCA 단자를 이용하는 이런 TV의 형태들을 먼저 다루면서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겉모습과 속 모습을 예상하는 것은 가능했었거든요. 그런데 (다다익선에) 실제 들어갔을 때 모습은 정말 달랐어요. 겉은 엄청 거대한 작업인데 속은 엄청 좁더라고요.
참 묘했어요. 예상은 했지만 예상한 것보다 더 뭔가 밀집되어 있고 그다음에 에어컨이 들어 있던 거에서 저는 깜짝 놀랐어요 당연하겠지만 에어컨이 큰 게 들어 있더라고요. 그 속에 그 모습을 실제로 봤을 때는 뭔가 감추고 싶은 속살을 본 듯한 에어컨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우종덕: 그러면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백남준 선생님의 작품들이 남긴 의미라든지 그런 것들이 동시대에서 지금 현재도 계속 이렇게 이야기되는 그런 거에는 어떤 지점이 있을까요?

신기운: 그 작가가 어떤 것을 우리한테 남겨주는지 그리고 어떤 가능성을 이야기했는지에 대해서 너무 다 잘 알고 있어요. 그게 엄청난 가치인 거죠. TV를 만든 사람과 TV를 개발해서 캠코더를 만든 사람은 분명히 미디어 아트를 하는 도구라고 만든 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많이 알고 있듯이 소니에서 캠코더라는 것을 만들었을 때 그거를 최대한 빨리 구하셔서 미디어 작업이라는 것을 하려고 노력을 하셨다는 것 그게 엄청난 선견지명을 타고난 많은 지점에서 보이는 그 행동을 그때 한 번 또 보여주신 것 같아요.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과 활용하는 사람과 그들은 다른 꿈을 꾸고 있지만 사실 결과는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백남준 선생님 같은 사람은 우리가 다 공유할 수 있는 그 지점을 정리해서 딱 좁혀주신 분 같아요. 신기술, 컴퓨터 기술이든 전자 기술이든 이런 것들이 미디어 아트의 당연히 가능한 어떤 부분으로 봐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지만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그 시절에 그거를 과감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으로 주신 거죠. 저는 그게 가장 큰 가치인 것 같아요.

우종덕: 백남준 선생님이 예를 들어 TV 부처를 60년대에 만드셨죠. 그런 걸 볼 때 백남준이 남긴 작품이 60년대, 70년대, 80년대
다다익선이 80년대 작품이고요. 그때 만들었던 작품이 지금도 계속 다시 만들어지고 사람들한테 이야기 되고 그러면서 계속 동시대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이 남아있는 예술가나 아니면 후배들이죠 아니면 사람들한테 계속 예술이란 무엇인지, 백남준 이야기하고 싶었던 무엇인지 살아남는 것은 무엇인지 그런 것에 대한 생각할 것들을 계속 던져주고 있어서 저한테는 그게 백남준 선생님의 또 다른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신기운: (백남준 작가는) 미래를 보는 학자적인 어떤 작가이기도 한 것 같아요. 항상, 도전과 제시를 해 주시는 분 같기도 해요 항상 느끼는 점이 그렇습니다.

우종덕: 선생님 말씀 감사합니다.

신기운: 저도 이야기 나눠서 반가웠습니다.

SHIN Kiwoun: Hello, Mr. Woo! Meeting you at a distance, even though we’re actually quite close, is really exciting and a pleasure for me.

WOO Jongduk: It’s a pleasure for me, too. While I was on my way here this morning, a thought crossed my mind. When Nam June Paik put together the Good Morning, Mr. Orwell broadcast in 1984, he became much better known in Korea. That was when I first learned about him, too. The kind of work that he struggled to create back then can now be done very simply with computers and the internet. I’m able to see someone in New York right from here, it’s really quite astonishing. It’s become such an ordinary thing. But for all that, it’s actually even more of a pleasure, when I think about you being farther away than when I saw you here. It’s truly a meaningful encounter.

SHIN Kiwoun: I watched Good Morning, Mr. Orwell on KBS when I was quite young, and I didn’t grasp its significance. It’s something we all recognize now, and it’s what we’re using right now for this interview. So, in that sense, I consider it truly meaningful.

WOO Jongduk: One of the things that Paik said, something he talked about in the 1970s, was called the “information superhighway.” When I first heard about it, I couldn’t figure out what he was talking about. By the 1990s, when the internet really began advancing, and we began exchanging information and videos online, it dawned on me that he had envisioned the future of the internet. I think about that sometimes when I use the internet.

SHIN Kiwoun: The reason for our conversation today is your involvement with The More, the Better. In my case, I was doing some technical consulting-related work for the restoration. So I spent over two years wrestling with certain issues, and you were also involved in related work. Although The More, the Better appears to be functioning well at the moment, your work stems from certain concerns that will come up based on its past history. I’m curious to hear if there was anything you couldn’t accomplish with the work.

WOO Jongduk: These days, previously created artwork isn’t just being preserved. It’s continuously being updated with contemporary technology, and you have a lot of different contributors to give the work a new, modern quality allowing it to continue to live on. It’s something I’ve thought a lot about. When people talk about Paik, they often focus on him as an artist, but he also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erms of bringing different people together. Seeing that, I got the impression that his artwork also embodies this aspect. So in my work, which I was doing long before the preservation and restoration was completed, I unfortunately wasn’t able to fully address this aspect, even though I really believe that it was one of the defining characteristics of Paik’s work.That is something I regret not addressing in my work.

SHIN Kiwoun: Paik is no longer with us today, but when you hear from the people who are still with us, his co-creators and contributors, their contributions should also be recognized. The works have survived, but these individuals should also be a part of the record. So while we remember the artwork itself, during the documentation process, there are many other people who took part in the creation alongside Paik, people whose contributions should have been documented, and I realized belatedly that I had overlooked them.

WOO Jongduk: Every time I look at The More, the Better as an artwork, I often have the same sense that you get looking at a monument, a Korean palace, or a tower, grand structures like these.Each time, I wonder about things like, “Who were the welders?” “Who installed each of these TV sets?” When you look at the cables at the back, they’re held together with what look like cable ties, and I’ve often wonder who did that. If you consider such details, The More, the Better involved many individuals who designed the structure, designed the monitors,and carried out all sorts of work on it. They should have been part of the archive, and I sensed how including such information could have greatly enriched the contextual understanding of the work.I’ve thought a lot about that, so I definitely know what you’re talking about.

SHIN Kiwoun: I’ve really come to appreciate how much of the work that’s being done today, contemporary artwork, is becoming part of the past. It’s what I’ve felt lately. The equipment and creations from my time as an active artist feel different when I turn them on or start them up these days, and that feeling seems to overlap somehow with Paik’s work. It gives me a new sense of how much of a burden it is to create work that anticipates technology and the future, and of whether it’s the work I should be doing. It’s been daunting for me. How is it for you?

WOO Jongduk: At some point, technology began to intersect with art, and because technology is a product of science, it inevitably continues developing. Today’s technology is becoming increasingly outdated. The media art of the past has transformed into “old media” and “new media” art. When I see things like that, I wonder how the material aspects of the machinery should be handled. In the minds of people today, whether it’s artists or especially the viewers who will be appreciating the art, I don’t think it’s a theme that can really have a unified understanding yet. Paik once said something that I often find myself thinking about. He said that the art that would endure in the future would be weightless in form. If art is weightless, that means it’s nothing but light. While I don’t know if this is why he worked in the video medium, it makes sense that if art exists as light, then the likelihood of it existing in data form is 100%.Perhaps this is what he had in mind. I have a question I wanted to ask you. During your two years of participating in the restoration, what stood out to you the most?

SHIN Kiwoun: The TVs using composite terminals and RCA terminals were the first thing I worked with on the project. So it was possible to anticipate what it would look like inside and outside. But when I actually looked inside the work, it was completely different. On the outside, it’s this enormous work, but it’s actually quite tight inside. I found that curious. I had this expectation, and in reality it was rather compact. Also, I was surprised to see air conditioning inside of it. It made sense, but it had this large air conditioner in it. When I saw that, it was like I’d seen something that should have been kept hidden. So that air conditioner left a lasting impression on me.

WOO Jongduk: In your view, what are some ways in which the significance of Paik’s work continues to be explored in contemporary discussions?

SHIN Kiwoun: We are all aware of his legacy and the possibilities he explored. The value of his contributions is immeasurable. The inventors of television or those who developed the camcorder obviously didn’t invent them as tools for making media art. However, as we all know, when Sony created the camcorder, he was the first person to buy one and to use it to create media art. As someone with that remarkable foresight, he’s once again showing us the kind of things that he showed us from many other perspectives. Though the people who develop technology and the people who use it may each have different visions, ultimately the results are unpredictable. In that sense, someone like Paik seems to have distilled the things we can all share and narrowed them down. The idea that new technologies, things like computers and electronics, should definitely be seen as part of media art is something we don’t question now. But during a time when this concept was questionable, he was bold enough to transform it into something that had to be reckoned with. To me, that’s his most significant contribution.

WOO Jongduk: In the 1960s, Paik created his TV Buddha. Looking at it now, his work spans the 1960s, the 1970s, the 1980s. The More, the Better is from the 1980s. And the work he created then continues to be remade and discussed by people today. What gives the work its enduring contemporary quality is that it prompts other artists, younger artists, and people in general to continue to think about the meaning of art, Paik’s intended message, and what it means to survive. It keeps posing those kinds of questions. To me, that’s another way in which Paik is significant.

SHIN Kiwoun: He’s always seemed to be a scholarly artist who anticipated the future, taking risks and presenting ideas. That’s how I’ve always felt about him. Thank you for your comments. It was a pleasure talking with you.

WOO Jongduk, The More, The B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