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MMCA
✍️ 김중업 다이얼로그 | Kim Jung-up Dialogue
2018
Client 국립현대미술관 MMCA
Project ✍️ 김중업 다이얼로그 | Kim Jung-up Dialogue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김중업 다이얼로그
2018.8.20 – 12.16

학예연구사 | 정다영
총괄 프로듀서 | 이성민 (삼삼오오)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Gwacheon)
Kim Chung-up Dialogue
2018.8.20 – 12.16

Curator | Chung Dah-young
Executive Producer | LJSUNGMIN (THREESFIVES)

작업 소개

김중업 다이얼로그 전시의 협력 기획 및 구성을 진행한 삼삼오오 이성민 총괄 프로듀서의 섭외로 전시에 참여하였다. 김중업 아카이브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영상 작품과 함께 작업한 동료 건축가, 작가, 평론가 등을 인터뷰한 시리즈 영상을 전시장에 상영하였다. 전시와 동명의 영상 작품 <김중업의 다이얼로그(2018)>에서는 서울, 부산, 제주 등 각지에 있는 김중업의 주요 건축물과 사라진 터를 영상에 담아 건축에 대해 자신만의 소신과 철학을 끊임없이 밝혀온 그의 목소리와 함께 구성하였다.

‘건축가라는 것은 내일에 건 생명이거든요.
그런데 지어 놓고 나면 그 허탈감이라는 것이 보통 큰 것이 아니예요.
역사가 앞으로 판단을 해 줄 겁니다.’

‘An architect’s life is stacked on tomorrow. But once the building’s done, I feel so empty. History will judge in the future.’

김중업 Kim Chung-up

크레딧 보기

크레딧

Executive Producer: LJ SUNGMIN(THREESFIVES)
Coordinator: Cho Hyun Dae
Translator: Kim Yoo-suk
French Proofreading: Yang Jiwon

Film by 57STUDIO
Director: Lee MeeJee
Camera: Production KEZR (Kim Sangil, Kwak JaeMin, Kim SangHyuk, Um JunHo)
Your Photographer (Jun SangJin)
Jang JiNam
Edit/D.I: Lee MeeJee
Music: Jeong JinHwa

Image materials courtesy of the Kim Chung-up Architecture Museum, KBS, Korea TV

프로젝트 내용

《김중업 다이얼로그》전은 한국 현대 건축의 신화적 인물인 건축가 김중업을 조망한다. 하지만 이 전시는 그동안 김중업에 관한 피상적인 진단과 신화화된 측면과는 거리를 두고, 예술과 건축의 관계를 매개로 그동안 논의되지 않았던 다양한 맥락 속에서 작가와 그가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전시다. 김중업의 타계 3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이 전시는 한국 현대 건축 전시를 꾸준히 기획해온 국립현대미술관이 김중업건축박물관과 공동으로 준비했다. 건축가 김중업의 생애 전반을 조망하는 첫 대규모 전시로서, 김중업건축박물관의 소장품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아카이브, 그리고 건물주로부터 대여한 자료들과 사진 및 영상 신작으로 구성했다.

1922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실무를 한 뒤 한국전쟁 이후 초토화된 한국 땅에서 한국적 모더니즘을 구현하고자 한 건축가다. 그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만난 예술가들과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국 문화예술계 중심에서 활동하며 예술가 들을 후원하고, 그들과의 협업을 오랜 기간 진행했다. 한국에서 최초의 건축 전시회를 열기도 한 김중업은 전시라는 문화양식을 일찍부터 이해하고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건축을 건물로 한정하지 않고 담론의 문제로 보고 예술매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진행했다. 그러한 사유의 흔적은 그가 남긴 이미지 아카이브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김중업 다이얼로그》전은 역순으로 진행되는 김중업의 작품 연대기를 첫 번째 대화의 시작으로 연다. 그리고 ‘세계성과 지역성’, ‘예술적 사유와 실천’, ‘도시와 욕망’, ‘기억과 재생’ 등 4개의 주제로 그간 김중업과 그의 작품에 관해 주변부에 머물렀던 문맥들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그간 논의가 부족했던 김중업의 후기 작업들과 한국의 중요한 예술가들과의 협업 과정, 도시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이제 막 촉발되기 시작한 한국 건축가 연구의 출발점으로서 건축, 예술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관계망들과 대화의 장을 여는 단초가 되리라 기대한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전시소개글

전시 설치 장면 (사진 | 김익현)

김중업은 1984년 10월, [KBS 10월 집중기획 한국의 문화주역 – 건축가 如泉 김중업]에 출연한다. 당시 나이 만 62세이다.


송지헌 아나운서 (이하 송): 저희 같은 경우에는 건축가들과 만나기가 쉽지 않거든요. 건축가나, 건축이라는 예술은 일반 대중하고 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건축가가 지어놓은 건축물들,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보십니까?

김중업 건축가 (이하 김): 사실 건축이라는 것은 인간하고 가장 밀접한 것 아니겠어요? 물론 건축이라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 지어지는 거고, 또 일단 인간을 감싸줘야 하는 거고요. 그런데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공기라던가, 물이라는 것이 우리하고 직결되어 있고, 이 건축도 마찬가지인데, 말하자면 사람이 집 속에서 태어나고, 집 속에서 살고, 또 집에서 운명한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좀 관심이 적은 것 같아요.

: 훌륭한 건축물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보십니까?

: 훌륭한 건축물이라는 것은 딴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보금자리의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한다는 기능적인 면하고, 또 봤을 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 아니겠어요?

Kim Chung-up starred in the KBS feature Cultural Leaders of South Korea broadcast in October 1984. He was 62 years old.


Song: It’s hard for us to meet architects. Architects and architecture seem distant from the public, too. What’s the effect of buildings by architects on the public?

Kim: In fact, architecture’s the thing closest to humans. Of course, buildings are built for humans, they must first shield humans. In life, things like the air and water are directly linked to us. It’s the same for architecture. People are born in houses, live in houses, and die in houses. Nevertheless, there seems to be little interest.

Song: If so, what’s a great building to you?

Kim: A great building isn’t something special.In principle, a great building isn’t anything else. Functionally, it must be a proper shelter for humans. It must also be beautiful, giving visual joy.

주한프랑스대사관 (1960) : 설계 공모 당시 로제 샹바르 대사의 적극적인 지원과 르 코르뷔지에의 추천을 받아 1960년, 김중업은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주한프랑스대사관 설계를 맡게 된다.


: 이것은 어떤 건물입니까?

: 이것은 프랑스대사관입니다.

: 이것도 상당히 우리의 눈을 깜짝 놀라게 했던 건물입니다.

: 프랑스대사관은 사실 그때 제 출세작입니다만, 이 작품을 만들고 나서 드골 대통령에게 국가공로훈장도 받았고, 또 슈발리에라는 기사 칭호도 받았습니다만, 그래서 외국에도 좀 더 알려진 건물이고, 그런데 그동안 좀 개악이 되었어요. 제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에. 그래서 옛날 모습하고 달라진 것이 아쉽군요.

French Embassy, Seoul (1960) : In 1959, with Ambassador Roger Chambard’s active supportand Le Corbusier’s recommendation, Kim designed the French embassy, which later became his representative work.


Song: What building is this?

Kim: It’s the French embassy.

Song: This was visually striking, too.

Kim: Yes. In fact, it made my name. After making this, I received the National Order of Merit from President De Gaulle and was knighted, too. So it’s a bit known abroad, too. But it’s been worsened a bit since, while I was abroad. So it’s a pity it looks different now.

주한프랑스대사관의 상징적인 조형물이었던 대사 집무실의 지붕이 구조적으로 취약하여 1970년대 철거된다. 2016년 12월, 주한프랑스대사관 신축 및 레노베이션 계획이 발표되었고, 사티와 매스스터디스가 공동설계를 맡았다.


조민석(매스스터디스 대표)

저희는 김중업 선생님의 오리지널 건물이 저희 건물에서 일종의 유전자라고 생각해요. 원래 김중업 선생님의 오리지널 안이 일종의 앙상블이죠.

저는 당연히 이 건물을 미학적으로 논의할 때, 앙상블로서의 주가 되는 두 건물의 두 개의 지붕의 무게감과 가벼움과 서로 대화하는 부분들, 남과 여로 비교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핵심적인 부분이었고요. 김중업 선생님의 원래 건물은 그대로 잘 복원될 부분들 복원하면서 햇볕에 그림자를 잘 받는 원래의 이상대로 가는 것이고요. 앞으로도 그런 중요한 역사성을 가진 건물들을 개입해서 하는 태도에서 그런 아주 미묘한 것들을 건축가들이 많이 고민해야 할 부분인 것 같아요.

The most notable motif of the embassy, the roof of the ambassador’s office was torn down in the 1970s due to structural weakness.
In December 2016, a plan to renovate and add to the embassy was announced. It was jointly designed by Mass Studies (South Korea) and Sathy (France).


Minsuk Cho (architect; representative, Mass Studies)

To us, Kim’s original building is a gene, so to say. His original plan is a kind of an ensemble.

In discussing this building aesthetically, of course, the weight and lightness of the two roofs of the two buildings, which form an ensemble, and the dialogue between them, which are also likened to male and female. These are the really crucial, key parts. As for Kim’s original building, you restore easily restorable parts and follow the original ideal, which was to be well-shaded. In intervening in such important, historic buildings in the future, architects must ponder much on such subtle points.

삼일빌딩(1969) : 김중업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삼일빌딩을 설계하였다.


: 그중에서도 저희가 김 선생님 생각하면, 오히려 삼일빌딩이 더 많이 알려지지 않았나 싶은데요. 그것을 지으신 지가 꽤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설계해서 지금 한번 돌이켜 보시면 삼일빌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글쎄요, 뭐 부끄럽습니다. 뭐 사실 15년이 된 건물인데, 저로서는 그때는 제 모든 실력을 다 발휘해서 도시 안에 하나의 전경으로서 까만 흑수정 같은 것을 만들려고 애써봤어요. 물론 지금 만든다면 조금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일단 그 삼일빌딩이라는 것을 놓고 볼 적에는, 아직도 아껴주는 분이 꽤 많으신 것 같아요. 그것은 어디서 오는 문제일까 같으면 비례에서 오는 문제예요. 비례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느 정도 예쁜 비례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아껴주신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 점은 작가로서 흐뭇하죠. 그렇지만 작가가 성장하고 있으니까 자꾸 불만스러운 거죠.

Samil Building (1969) : Though Kim designed the Samil Building, the tallest in Asia then, he was not paid for the design and even had to relinquish his Seongbuk-dong home due to exorbitant taxes.


Song: When we think of your works, out of them, the Samil Building seems more well-known instead. You designed and built it a long ago, right? Looking back, what do you think of it?

Kim: Well, it’s embarrassing. It was 15 years ago. Back then, I tried hard, with all my might, to make something of a black morion, as a foreground of the city. Of course, if I were to build it now, it’d be a bit better. But, as for the Samil Building, many still seem to cherish it. Why? It’s because of the proportion. Then and now, it has a rather pretty proportion. That seems to be why people cherish it. That’s rewarding as an artist. But you’re never satisfied because you grow artistically.

김중업은 이 건물을 짓고 1971년 프랑스로 추방당했다.

군사정권에서 행한 도시정책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했던 김중업은 1971년 8월 10일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수사기관에 끌려가 감옥과 해외 추방 중 선택을 강요받았고 김중업은 1971년 프랑스로 강제 출국한다.

한국을 떠나기 전 신세계화랑에서 <김중업 건축 사진전>을 열고, 프랑스 영화제작자와 함께 만든 기록영화 <건축가 김중업>을 공개했다. 김중업이 직접 프랑스어로 해설을 붙였다.

After constructing the building, Kim was exiled to France in 1971.

Having strongly decried the military regime’s urban policy, he criticized the government for a 1971 uprising by fraudulently and forcibly evicted and resettled squatters. In the end, he was taken to an intelligence agency and forced to choose between jail and expulsion. As a result, he was banished to France in 1971.

Before leaving for France, Kim held a farewell solo exhibition at Shinsegae Gallery and unveiled Kim Chung-up, Architect, a documentary jointly created with a French film producer. He narrated the commentary in French.

Kim: 저의 작품은 분명 오만하고 고독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오만에 자리 잡지 않고, 고독에 머물지 않는 건축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군중에게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요. 그리고 계약서가 우리의 예술을 수익성을 위한 일로 타락시켰습니다. 멀리 떨어진 산에는 호숫가에 작은 집도 있어요. 하지만 그 호숫가의 작은 집은 큰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 건축가들에게 던져진 수많은 문제 중 하나입니다. 재정을 대는 사람들은 절대 대규모 주택단지와 서민임대아파트와 신도시 안에 살게 될 사람들의 의견을 묻지 않아요. 과연 그들은 그들이 만들고 있는 것 안에 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건축가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전혀 사람을 위해서 건물을 짓지 않는단 말입니다. 오늘날 건축가는 무엇인가요? 누구란 말인가요? 그저 임대를 위한, 거대한 기계일 뿐입니다. 강제로 만들어 내는 현대화. 아, 저는 정말 강요된 현대화가 싫습니다. 사람은 노예나 다름없죠.

Kim: My works are clearly arrogant and solitary. But is architecture that doesn’t remain in arrogance and solitude possible in the world? We’re completely apart from the masses, and contracts have debased our art into work for profit. In far-off mountains are small houses by the lake. But the small lakeside houses aren’t for those working in big cities. Then who are they for? This is one of the many questions we architects face. Financiers never ask the opinions of those who’ll live in large housing estates, public rental apartments, new towns. Do you think they want to live in what they build? No, I don’t think so, not at all. Such are architects’ fundamental problems. Really, we no longer make buildings for people at all. What are architects today? Who are we? We’re only large machines for leases. Forcibly created modernization. I really hate forced modernization. People are just like slaves.

프랑스와 미국을 거쳐 1978년, 김중업은 한국으로 귀국한다. 7년 만에 돌아온 한국이 무분별한 개발과 획일화된 도시로 변모하자 안타까워했다.


: 사실 우리는 고향을 되찾아야 할 것 같아요. 너무 획일화되어서 고향이 가지고 있던 멋들이 자꾸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것이 지금 젊은이들에게 주는 영향이 너무 크지 않느냐. 일단 사람들이 마음 놓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그런 구역들을 자꾸 넓혀 가야 할 것 같아요.

: 어릴 때 마음대로 뛰어놀던 골목, 어른들에게도 그런 골목이 필요한 거니까요.

After staying in France and the United States, Kim returned to South Korea in 1978. Returning after 7 years, he was vexed to find the nation changed into uniform cities due to indiscriminate development.


Kim: In fact, we must recover hometowns. They’ve all become so uniform, their traditional charm keeps vanishing. And it’s affecting youths today too much. We must first widen areas where people can roam freely.

Song: Adults need things like alleys they freely played in as kids, too.

<뉴스> 제90차 IOC 총회에서 동부 독일을 비롯한 동구라파 공산권 여러 나라가 88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고 있는 가운데, 88 서울올림픽의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 지금 88 서울올림픽, 86 아시안게임 온 국민이 꾸는 하나의 꿈이거든요.

: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추구하는 꿈이 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좀 더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그 달라지고 있는 꿈을 어떻게 뒷바라지 해 줄 수 있느냐가 건축가의 역할이고, 건축가는 꿈 없이는 작업을 못 해요. 그러니까 그 꿈을 위해서는 그 꿈에 부흥한 작품들이 나와야겠지요.

: 그러니까 88 서울올림픽이라고 하면 온 국민이 건축가예요.

: 그렇죠. 옳은 말씀입니다.

With many Eastern Bloc nations such as East Germany saying at the IOC session they’ll take part in the ’88 Seoul Olympics, preparations for the Olympics are well underway. With the creation of the Olympic Park in Dunchon-dong…

Song: The ’88 Olympics and the ’86 Asiad are the whole nation’s dreams.

Kim: It means the dreams we pursue in life are changing. They’re getting a bit loftier, too. The role of architects is how to support such changing dreams. Architects can’t work without dreams. So we need artworks that meet those dreams.

Song: So, with the ’88 Olympics, everyone’s an architect.

Kim: Yes, you’re right.

올림픽 세계평화의문(1986) :  김중업의 말년에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지만, 원안과 달리 외부 요인으로 인해 최종안이 세 차례 변경되었다. 김중업의 건강이 많이 쇠약해져 당시 사무실의 실장이었던 곽재환이 설계를 주도했다. 예술가 이승택이 열주의 괴면 조각들을, 백금남이 지붕의 사신도를 제작하였다.

World Peace Gate, Olympic Park (1986) : Though Kim devoted himself to this project in his late years, due to his frail health, Kwak Jae Hwan, then a staff member, led the design, and artist Lee Seung-taek sculpted the masks.

곽재환: 1985년도에 그 역시 현상설계로 나왔는데 (설계 개념은) 5,000년 우리 민족의 염원을 날개에 담아서 띄운다는 것이었죠. 선생님께서 항상 말씀하신 게 고구려의 호연지기,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기상을 항상 말씀하셨고, 또 샤머니즘에 대한 우리 민족의 원류와 같은 힘 같은 것들을 많이 말씀하셨어요. 그런 것들을 나름대로 제가 구현해본 거죠.

이승택: 김중업 선생님이 우리 것을 현대화하는 그런 작업에 아주 몰두하고 있었어요. 평화의 문 그 자체도 그렇고 그 주변에 조각물들도 전부 한국적인 것과 연결되는 것이에요. 독특한 형태를 우리 전통 속에서 찾자. 그래서 탈을 그분이 제안을 한 거예요. (전통의) 미라는 것은 역시 역사, 긴 시간이 흘러도 보기 좋은 것이라고 느껴졌어요.

Kwak: That, too, was in a prize design contest in 1985. It was to give wings to Koreans’ wish, to let it soar. Kim always spoke of the vigor of the ancient Korean kingdom of Goguryeo, the most powerful spirit in our history, and the originary power of shamanism. He tried to realize such things in his own way.

Lee
: Kim was immersed in modernizing Korean culture. The World Peace Gate and sculptures around it are tied to Korean culture. The idea was to find unique forms in our tradition. That’s why he proposed Korean masks. So I felt that the beauty of tradition, beauty was good to look at even after a long time.

1988년 5월 11일, 서울올림픽 개최를 몇 달 앞두고 김중업은 당뇨와 고혈압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Paul: 김, 당신은 언젠가 시를 짓겠다고 건축을 그만뒀지요. 그리고 다시 건축으로 돌아오기 위해 시를 그만두길 선택했고요. 사실 당신은 건축을 계속할 힘을 시에서 구한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나요? 시인이었다가 지금은… 아니 당신은 지금도 시인이면서 건축가라고 해야겠지요.

Kim: 폴, 아시다시피 모두가 시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의 표현에 사용되는 악기일 뿐이에요. 군중의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Paul: 그럼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죠.

Kim: 그래서 저는 시의 심오함 속으로 내려가서 호흡을 하고 온 것입니다. 다시 표면으로 올라와 건축을 할 힘을 얻기 위해서요. 여기 이 대학은 건물은 비행기 활주로를 만들기 위해서 곧 헐릴 것입니다.

On May 11, 1988, only months before the Olympics, Kim passed away due to complications from diabetes and high blood pressure.

Paul: Kim, you quit architecture once, saying you’d create poetry. And you’ve chosen to discard poetry to return to architecture. Don’t you think you’ve, in fact, gotten the energy to continue with architecture from poetry? Once a poet, now… no, you’re still a poet as well as an architect.

Kim: Paul, as you know, everyone’s a poet. And we’re only instruments for expressing poetry. An art for the masses. Art for art’s sake is insufficient, don’t you think?

Paul: Of course, I do, too.

Kim: So I’ve gone down to the depth of poetry and breathed, to get the energy to resurface and work with architecture. This college building here will be torn down soon to make a runway.

김중업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제주대학교 본관은 사라지고, 현재 제주대학교 부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들어섰다

정인하: 김중업 선생님이 만들어낸 영향은 좀 더 다층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분의 건축에 나타나는 공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하는데요. 과거에는 공간이라고 하면 내부공간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외부와 내부가 통합된 관점, 그러니까 랜드스케이프라는 관점. 풍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김중업 선생님의 공간 개념은 좀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지금의 현대 건축가들에게 또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한 건축가를 해석하고, 그 해석이 하나의 시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시기에 계속해서 이뤄지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런 것이 그 건축가를 풍부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서 한국의 건축계를 풍부하게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Kim’s most cherished work, the building at Jeju National University was dismantled, and the site is occupied by the university’s middle and high schools.

Jung: Kim’s influence must be grasped from a more multilayered view. It’s especially true of the understanding of space in his buildings. In the past, space only meant interior space. But, now, space is seen as combining the exterior and the interior, or landscape. Seen thus, Kim’s concept of space must be expanded further.That can affect architects today, too.

Seen thus, interpretations of an architect don’t stop in a certain era but are continued in other eras, in new ways. That can enrich that architect and South Korean architecture as well.

: 아까도 여러 작품을 쭉 봤습니다만, 직접 지으신 건물 앞에 세월이 흐른 다음에, 지나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 그니까 부끄럽죠. 부끄럽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제가 지은 것도 일단은 저로서는 크게 만족이 안 가니까. 그러니까 제가 만족이 안 간다는 것은 역사가 만족을 안 해준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려요. 제작하고 있을 때는 즐거워요. 열심히 뭔가 하려고 애써요. 그런데 지어 놓고 나면 그 허탈감이라는 것이 보통 큰 것이 아니에요. 그런 점으로 볼 적에는 작가라는 것은 언제까지나 말하자면 부끄러운 것이죠. 건축가라는 것은 내일에 건 생명이거든요. 역사가 앞으로 판단을 해 줄 겁니다.

Song: We surveyed your works a while ago, but what is it like to stand before one of your buildings after time has passed?

Kim: That’s why it’s embarrassing. It’s embarrassing because even my buildings don’t really satisfy me. So when I say I’m unsatisfied, it ends up meaning history isn’t satisfied. It’s a joy when I’m producing. I try hard to do something. But once the building’s done, I feel so empty. In that respect, an artist’s always embarrassed. An architect’s life is staked on tomorrow. History will judge in the fu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