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릴케 같은 경우는 프라하에 살면서 독어로 작업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언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대가 지금 입장에서 동시대적이거나 현대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고요. 독일 같은 경우에는 몇십 년 전에 광부나 간호사로 일하기 위해 독일로 가셨던 분들의 자녀가 많이 살고 있는데, 뉴욕 같은 경우는 물론 여러 가지 직업이 있겠지만, 식당이나 세탁소 같은 경우에 주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 많습니다. 요즘 베를린이나 뉴욕을 보면 한국 사람들이 그곳에 이민을 가는 이유가 굉장히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동기는 시대마다, 세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주민들이 다시 자녀를 낳을 때 (제 조카처럼) 그 자녀들이 그 장소에서 다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줄리엔 로어츠
아시아 예술 극장에서 다음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될 텐데,어떤 면에서 극장이 전시공간과 다르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런 요소들 – 영상, 음악, 공연이 함께 어울릴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성환
제게 익숙한 공연 공간은 – 왜냐면 제 공연이 그동안 미술관에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관람객들에게 많은 자유가 있는 열린 공간입니다. 설치작품 같은 경우에는 관람객들이 가까이 가서 어떤 재료를 썼는지, 어떤 규모인지 등을 매우 자세히 살펴볼 수 있죠. 저는 극장, 프로시니엄 무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관객이 특정한 것들로 규정되는 되는 이런(두산아트센터) 공간 말이죠. 이런 공간에서는 관객들이 건물 구조에 의해 규정됩니다. 관객들은 한 방향의 시각과 관점밖에 가질 수 없죠. 만약 제가 고개를 이렇게 돌리면, 저분은 공연 내내 제 귀만 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는 이러한 위계질서에 관심이 있는데요. 이미 객석에 위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생각으로는 시간의 문제가 있겠네요. 전시에서는 관람객이 어디에 가고 싶은지 정할 수 있고, 또한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도 있죠. 물론 극장에서도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조금 더 제약적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 있죠. 저는 때로 공연계와 미술계 사이의 긴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장도 관객이 나갈 수는 있지만, 굉장히 힘들죠. 사람들을 비집고 나가야 하고, 보통 극장을 중간에 떠나시는 분들을 보면 몸을 숙이고 티 내지 않고 나가려 합니다. 떠나는 것처럼 보이길 원치 않죠. 미술공간은 쉽게 떠날 수 있습니다. 익명의 사람이 될 수 있죠. 그런 점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관객들이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연자와 관객 사이에는 그런 긴장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공연의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는 무대라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실제로, 라이브로 보여줄 때 사람들이 그걸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 제가 무대에서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 나와보라고 한 뒤,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이 사람은 진짜 현실의 인물입니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겁니다. 미리 계획된 것으로 생각하겠죠. 무대에서 오직 진실인 것은 인위성이고, 연극은 이 점을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냅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 세계에서는 만약에 뭔가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금이다. 이 금의 가치를 살펴보자’라고 할 때 이것이 금이다라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습니다. 예술가는 그것의 가치나 진실, 현실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만,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것은 진짜 금이다’라는 맥락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 무대 위에서 금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아무리 실제 금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도 실제 금이라고 믿지 않으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