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 아시아의 사진 : 임정의 구술사
2015
Client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Project ✍️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 아시아의 사진 : 임정의 구술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아시아의 사진 : 임정의 구술사
2015

Asian Culture Center
Archive & Research
Photography in ASIA : Oral History Lim Chung-eui
2015

작업 소개

이 컬렉션은 ‘아시아의 사진’ 아카이빙 프로젝트의 한국에 관한 자료 컬렉션 중 하나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의 원로 사진가들의 생애사에 대한 구술을 기록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한국 사진사의 부족한 서술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사진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서울 지역 주류 사진계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정리되고 있는 반면, 사진계에 충분한 자료를 남기지 못했거나, 서울 이외의 지역 사진가들은 상대적으로 여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예술사진 영역이 아닌, 실용적 영역에서 활동했거나, 지역에서 활동한 사진작가들을 적극적으로 포괄하였다.

정정회 구술사
Oral history Cheung Jung Hoi

강봉규 구술사
Oral history Kang Bong-gyu

김한용 구술사
Oral history Kim Han yong

임정의 구술사
Oral history Lim Chung-eui

크레딧 보기

크레딧:

구술자 : 임정의
아시아의 사진_구술채록 책임연구원 : 정주하
아시아의 사진_구술채록 연구원 : 유지의,현지연
정보원 예술감독: 김선정
진행 : 정주영, 노해나
영상 및 음성기록 : 스튜디오 것(윤유성)
영상 구성 및 편집 : 57STUDIO(이미지)
번역 : 박재용
자료협조 : 임정의, 청암건축사진연구소
주최 : 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주관 : 아시아문화개발원 정보사업팀

‘아시아의 사진’은 사진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근현대사를 조망하는 컬렉션으로 아시아 사회, 정치 및 문화를 기록한 4명의 사진들과 사진가들의 구술 채록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은 아시아가 근현대를 거쳐 오면서 사회와 문화를 기록해 온,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수십 년 전의 도시 공간, 건물, 공장, 광고사진, 보도사진은 이제 사실성을 전달하는 임무에서 벗어나 당시 문화와 역사를 기록한 시대상의 보고로 인식되고 있다. 수집된 컬렉션은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근대의 격변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또한 원로 사진가들의 생애사 구술 채록 영상은 생생한 증언을 통해 사진 기록의 서사적 공백을 보완해 줄 것이다. 향후 대만,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전역으로 수집 범위를 확장하여 아시아 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출처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 문화예술 전문 주제 아카이브 전시’’ 中 ‘아시아의 사진’ 전시 소개글

(임정의)
1944년 6월 14일생인데요. 원출생지는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흑록동 1166번지. 태어나가지고 애기 때죠 뭐, 한 삼사 개월, 한 사오 개월 고정도 되가지고 아버님이 거기서 사진 활동하는 거보다 서울에서 활동한다는 걸 미리부터 준비를 했나 봐요. 44년에 태어나가지고 그 해에 서울 삼각지에 ‘한미카메라점’이라는 거를 만든 거여요. 따라서 올라왔죠. 나는 기억이 안 나요. 그러다 집은 가회동 38번지라고 거기서 집을 한 채, 초가집을 사가지고 거기서 살고, 일은 삼각지서 하고. 거기서 내가 한 대여섯 살 이렇게 자라온 기억이 얼핏 나긴 나는데 가물가물해요.

그 후에 거기서 6·25전쟁 나는 바람에 폭격을 맞았어. 폭격 맞아가지고 6.25 끝나고 나서는 주로 가회동 집에서 필름을 현상을 하는 거야. 필름을 많이 찍어 오면은 집에서 밤새도록 하면은, 나는 어리니까 “야, 이것 좀 물에다 수세 좀 해놔” 그러면, 맨날 그냥 수세를 도와드리고. 그담에 물이 부족했잖아요, 옛날에. 그걸 가지고 삼청공원을 가는 거야. 시냇물, 흐르는 시냇물 있잖아요. 거기서 필름이랑 인화지들을 수세를 했어요.

(Lim Chung-eui)
I was born on June 14, 1944. My original birthplace is 1166 Heukrok-dong, Galsan-myeon, Jungju-gun, North Pyongan Province in North Korea. My father was a photographer. He had been preparingto move to Seoul until I was three or four months old. My father was a photographer. He had been preparingto move to Seoul until I was three or four months old. So, I was one-year-old when my father opened Hanmi Camera Shop in Samgakji in Seoul. I was taken to Seoul. I don’t remember anything. My home was in 38 Gahoe-dong. My parents bought a thatched-roof house. They worked in Samgakji. I don’t remember well that I lived there until I was five or six.

The shop was hit by a bomb from the sky during the war. After that, my parents developed films at our home. When we had many film rolls to develop, we worked overnight. I helped my father washing the film strips and prints. Water was running short then, so I went to a stream to wash them.

기억이 나는게 물은 정지된 데다가 하면 안 되는 거를 내가 봤죠. ‘흐르는 데다 이렇게 하는구나.’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봤는데, 재동초등학교 다닐 땐데, 밤에, 이렇게 사진 필름 현상하고 그러면 밤에 많이 하잖아요? 낮에는 할 수가 없잖아. 밤에 하다가 새벽 좀 눈 붙이고 학교 가면 약간 꾸벅꾸벅, 아, 잠도 오고, 좀 약간 피곤하게 살았지, 어렸을 때부터.

(정주하)
그래도 영광이시네요. 아버님께서 아드님의 그러한 할 수 있는 거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귀한 필름을 맡기신 거 아닐까요?

(임정의)
그건 믿음보다도 그건 운명의 장난 같애, 그냥 해야 돼. 어머님이 다 못하니까 옆에서 잠깐잠깐 해드렸지, 내가 전적으로 한 게 아녜요. 나는 어쩌다가 한번.

(정주하)
44년에 오셔서 서울에서 시작을 이제 막 하신다면 여기가 굉장히 낯선 곳인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진계에 상당히 중요한 일도 하시고 또 많은 기록을 남기실 수 있으셨는지 정말 궁금한 부분이거든요.

(임정의)
48년도에. 육군사관학교를 들어갔는데, 그게 8기 특2반이라고요. 6.25 전에 임관을 받았나 봐. 49년도에, 그때 왜 그러냐하면 이게 엘리트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그런 사람들을 모아야 될 거 아냐. 아버님한테는 주로 기록하고 사진하는 거를 옆에서 많이 요청을 했나 봐요. 6.25 발발한 날이 6월 25일 날, 우리집은 가회동 살았죠. 아버님은 (집에서 )아마, 장교니까, 소위인가 그럴 거야 아마.

그 첫 출근은 비상 연락병이 연락 와 가지고 인제, (전쟁이) 터지니까 비상소집이 됐나 봐요. 그 사람이 중령이었던데 보도실장인가, 보도과장으로 하는 분이, 빨리 가서 신문사 기자들하고 취재하고 오라고 그래 가지고 쓰리코타 타고 문산을 간 거야. 정말 (아버님이 찍은) 사진들 보면 그 부교에서 피난민들 사진 찍으면서, 그걸 다 냉겨 놓은 거야. 인도교는, 한강 인도교는 먼저 폭파됐고, 그담에 한강철교가 또 폭격된 거야, 못 내려오게. 한강 인도교는 먼저 폭파돼서 아버님은 옆에 부교 타고 내려갔는데. 그담에 거기서 사진을 많이 찍었어. 주로 카메라 가지고 다니는데, 카메라 가지고 다니다가 보면은 필름을 찍잖아요. 그러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어디 대구나 대전 내려가고, 대구 내려가고 부산 내려가잖아요, 제일 먼저 하는 게 사진관 하나 접수하는 거예요. 필름을 현상을 해야 될 거 아니야. 필름을 현상 해 가지고 거기서 그걸 또 인화를 쪼그맣게 해요. 그래서 이제 보도자료 만들고 이런 걸 많이 했나 봐. 지금도 그 앨범이 있어요. 그때 1950년 가을에 만든 사진 앨범이요, 붙여가지고 거기다 캡션 다 써 넣은 거. 어, 그것 참, 그런 걸 이렇게 한 걸 보면은 어우, 진짜 대단했어.

I saw that I would need flowing water. I naturally understood it. I was an elementary school student then. We developed films in the night since it was not possible during the day. So I worked on films during the night, took some sleep, and went to the school in the morning. Then I felt a bit sleepy. So I’ve been living like this since I was young.

(Jung juha)
Don’t you think that your father really trusted you enough to give all those films to develop by yourself?

(Lim Chung-eui)
More than that, I just had to do it. It was like a twist of fate. I was helping my mother. I was not by myself. I did it from time to time, by chance.

(Jung juha)
Your father came to the South in 1944. However, he made a significant contribution to the photography scene. And he left many records. How was it possible?

(Lim Chung-eui)
He entered the Military Academy in 1948. He was appointed as an officer in 1949 before the Korean War broke out. The academy wanted to facilitate a group of elites. My father was asked to make records and took photos. On the day when the war broke out, we were in our home. My father was a second lieutenant.

An emergency messenger came to tell the news. There was an emergency call for the army. A lieutenant colonel Kim Kyung-soo, a then manager of public relations, told my father to cover the situation with journalists. He went to Munsan, riding a military truck. He recorded the line of refugees, standing on a floating bridge. The footbridge was blown up first. The iron bridge was hit by a bomb to stop people going to South. My father had to walk on the floating bridge but he made many photos there. He had to use analog films then. He carried his camera around. What he had to do first when he went to other cities was to arrange a photo studio. What he had to do first when he went to other cities was to arrange a photo studio. It’s because he had to develop the films. Then he created a small print of photos. Those prints were used for different purposes such as creating a newsrelease. I still have the photo album from Fall 1950. It is with all those captions I think my father did a great job in creating such records.

(정주하)
근데 선생님 전공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하셨다고 저희가 조사하였는데요. 어떻게 경영학과를 가시게 되셨습니까?

(임정의)
아버님이 사진을 못하게 했어요. 사진 못하게 하고 사업, “앞으로 사업해라. 사진 해가지고는 비전(vision)이 없다”. 아버님이 많이 경험을 했잖아요. 해봤는데, “한국에서는 가능성이 없다.” 사진통신사도 해보고 뭐 관광사진화랑도 해보고 많은 걸 해봤는데, 좀 아들한테는 그런 걸 물려주기가 싫었던 거 같애 내가 볼 때는. 그 첫 직장이 케이비에스(KBS) 보도부이셨지요. 게 68년에 국방(부)국군영화제작소에서 근무를 하는데, KBS보도부에 카메라 기자가 필요하다는 거야. 무비 카메라. 스틸이 아니고. 근데 사람이 없어요. 국내에,제가 잡혀가지고 한 일 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필동에 있었다고. 합참 옆에. 근데 ‘이왕 여기보다는 좀 (케이비에스가)낫겠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틀리죠. 보도부에 카메라기자로 들어갔는데….

(정주하)
근데, 왜 당시에 사진기자가 아니고 취재기자로 들어가셨죠?

(임정의)
그게 국군영화제작소에서 동(動)사진을 했잖아. 그니깐 사진은 사진대로 하는데, 동영상을 하다보니까 맨날 카메라를 라이카쓰리에프를 휴대하고 다녀, 항상. 어디 전방이나 어디 갈 때는 꼭 내가 찍어 놓는 거를 좋아해요. 기록하는 거. 육구(6×9인치)필름 넣어가지고 이콘타 라고 또 있어. 그거하고 라이카쓰리에프, 이렇게 엘마렌즈 아버님 쓰시던 거를 가끔 가지고 다니는 게 이게 동사진은 ‘드르르’, 이게 뭐 안 남아요. 무슨 말이냐면 스틸은 정확하게 이렇게 기억이 되는데, 그거는 약간 틀리더라고.

(Jung Juha)
But you studied business management in the university. What made you learn management?

(Lim Chung-eui)
My father didn’t allow me to study photography. He wanted me to become a businessman. He thought photography did not have any vision. His experience told him that the situation in Korea was hopeless. He tried to do different things with photography. But he didn’t want his son to follow a similar career. Your first workplace was the reporting department of the Korean Broadcasting System. They told me that the reporting department needed a camera operator. Not of a still camera but of a movie camera. But there was no one who could operate the camera. I was working for the Army Film Studio then. It was in Pil-dong. Then I thought KBS would be a better working place. KBS had a different atmosphere. Anyway, I got a job of a camera man there.

(Jung Juha)
But why did you get your job not as a camera man but as a reporter?

(Lim Chung-eui)
I worked on moving images at the military film studio. I had to work on still images while working on moving images, too. I always carried my Leica 3F for moving images. I always liked to leave records when I visited different places. I often carry an Ikonta camera with 6 by 9 film and a Leica 3F lens. I often carry an Ikonta camera with 6 by 9 film and a Leica 3F lens. The moving images leave nothing behind. A still image can capture things in an exact manner.

(정주하)
그러다가 73년에 케이비에스에서 코리아헤럴드로 그 자리를 옮기신 거죠? 코리아헤럴드 계시면서 우리 국가에 여러 가지 그 변혁되어진 사회적 현상들을 많이 경험하셨잖아요. 그 중에서도 육영수(陸英修, 1925~1974) 여사 피격현장에 계셨던 거로 저희들이 조사하였는데요.

(임정의)
그때 8월 15일 날 국립극장에서, 장충동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행사를 했어, 다음 날 이제, 미리 하루 전에 오더(order)를 줘요. 너 아침 10시부터 하니까 거기 가라고. 그 명단은 이제 청와대에서 딱 어디야 조사해요. 항상, 신원조회. 박정희 대통령 나오면 꼭 미리 하루 전에 다 해줘야 돼. 어우 갔는데, 대게 대통령 연설하고(나면) 끝이야. 사진 많이 찍어봐야 그게 그거야. 전경(全景)하고 그다음에 연설하는 거 한 서너 장만 찍고 나와 버려. 나오고 있는데 “어! 따당!”, 어! 로비 안에 있는데 ‘따당’ 소리가 나.

(정주하)
아, 실내에서 촬영하시고, 촬영하시고 나와서 로비에 계시는데….

(임정의)
조금 있으면 끝나겠지 했는데 어우, “빠방!“ 소리가 나는 거야. 나중에 육영수여사 장례식, 중앙청에서부터 행렬하는 거 쭉 동작동까지 다 커버하라 그래서 다 커버하고 끝냈지마는 모든 게 근거, 증거 이게 다 필요한 거야. 신문사는 육하원칙(六何原則)에 의해서 찍잖아요. 언제, 어디서, 어디서부터 무엇을, 누가, 왜. 이런 게 딱 갖춰져야 한다고. 사진도 한 장 뭐 이렇게, 아버님이 찍은 사진을 보면 거기 시간성, 장소성이 있어요. 딴 사람들이 찍은 거하고 틀려. 왜 틀리냐하면 그냥 제 3자가 보는 사진들을 읽을 수가 없어. 이게 어디 장소도 안 나오고.사진 상에서도 백그라운드라든가 그런 거를 같이 담아줘야 되는데. 사람을 찍어도 마찬가지고. 가족사진들을 보면 옛날에 그런 거를 내가 많이 보고 느끼다 보니까, 약간 그런 영향이 있을 거예요.

(Jung juha)
You moved from the KBS to Korea Herald in 1973. You experienced a variety of societal changes while you were working at the Korea Herald. You also witnessed the assassination of the first lady in 1974.

(Lim Chung-eui)
It happened on the 15th of August at the National Theater. A day before, an order came from the higher-ups. The government sent a list of invited people. We had to confirm everything beforehand. I went there on the day. But you don’t usually take many photos for official events. I went there on the day. But you don’t usually take many photos for official events. I came out from the auditorium, then I heard the sound of a gun.

(Jung juha)
You were at the lobby when it happened. Yes. The sound came from inside.

(Lim Chung-eui)
I later covered the funeral of the first lady. I later covered the funeral of the first lady. Everything needed to have background and reason. There was a need for when, where, who, what, how, and why. My father’s photos carry time and place. It’s different from photos by others. Usually, it’s difficult to read them in photos. It’s usually difficult to see the location in photos. The background of photos is not captured well. The same applies to the photos of people. I must have been influenced by my father.

(정주하)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코리아헤럴드』를 그만두셨잖습니까? 몇 년도에 그만두셨죠?

(임정의)
75년 봄

(정주하)
이유가?

(임정의)
나하고 헤럴드에서 친하게 지낸 친구가 누구냐 하면 문화부 기자였어요. 다 기자들도 많이, 취재기자들하고 같이 동행해서 친하기는 한데, 한대수라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친구가 있는데,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와서 영어를 잘 해. 히피로 걸렸어. 김포공항에서 들어오다가 국내 1호로 걸린 친구가 있어요. 가수야 가수. 한대수가 거기 공간이라는 데서, 《광복 30주년 종합전시장프로젝트》를 하는게 있는데 사진 담당이 필요하다 이거야. 근데, 거기 나는 공간이라 회사를 몰랐어요. 75년 8월 15일에 오픈을 하는데, 내가 들어간 게, 5월 달에 들어갈까 말까를 하는데, 4월부터는 얘기가 나왔어요. 한 번 가봤는데, 회사가 까만 벽돌에 멋있긴 한데, 이 뭐하는 회산지 내 전혀 몰랐거든. 한 달 동안 고민했어요. 들어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너무 멋있으니까. 회사가. 인테리어, 건축하는 데 아냐. 그런데 프로젝트를 하는데, 이게 이렇게 두꺼워 책이. 리스트가 한 만장 필요해, 만장. 사진이 만장이라는 게 엄청, 그건 리스트 이제 다섯 개 관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나중에 내가 헤럴드 있을 때 오만 오천 원인가, 육만 원 월급 받을 때야. 그때는 많이 받았어. 사만 오천 원, 오만 원이었으니까. 일간지 조중동에서는 대게 한 오만 원 전후 했어요.

근데 이게 딱 나오는데, 월급은 두 배 내지 세 배를 내가 얘기를 했지. 그거 할래문(하려면), 한 십오만 원 달라고, 거기 최고 실장이 십이만 원인가 그렇더라고. “아, 첨 들어오는 사람이라 십만 원까지 해주겠다.” 하여간 3개월 동안 일하는데, 반은 집에 못 갔어요. 처음에 공간사랑이 있어요. 공간사 건물. 처음에 나한테 그걸 하나 딱 찍어달라고 그러더라고. 그담에 <창암장>이라고 저 평창동에 이여사댁 있어요. 그 바위 위에,그게 뭐냐면 프랑크 로이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의 <낙수장>을 본 따서 주택을 만든 게 있어. 시냇물 흐르고 바위 위에 건물 있어요. 그걸 찍어달라는 거야. 그런데 처음에 딱 찍어주니까 어, 건축사진 좋대. 딱 인정을 받았잖아요.“어, 굿(good)!” 그래. 그담에 “너는 말이야 한국에서 이거 한 번 해보라고. 건축사진을 한 번 니가 하라고.” ‘글쎄 그거 뭐, 돈이 되나?’ 뭐 되기도 하겠지마는, 나도 이제 들어가서 하는데, 좀 이게 누군가는 해야 될 거 아니냐 그래서 하긴 했어요. 그래서 오늘날까지 왔지만.

일본의 그 오사무 무라이 선생을 초빙해 가지고 작품을 찍은 거야. 그 대가 옆에서 같이 찍을 수가 없으니까 나는 도면에다가 메모만 딱 했다가, 나중에 다 찍었지마는. 나중에 내가 (무라이 선생이) 간 다음에 많이 찍어 가지고 다음에 올 때 딱 보여주니까 어, 놀라는 거야. 무라이도. 어디서 이렇게 많이 늘었냐고. 무라이 선생이 그때부터 나를 ‘좋다’ 인정을 하는 거야. “니가 한국에서 잘 해라.” 내가 또 한국에서 찍은걸 딱 보여주기도 하고. 서로 대화를 많이 했어요.

(Jung juha)
You quit the Korea Herald afterward. When did you quit your job?

(Lim Chung-eui)
I quit in the spring of 1975.

(Jung juha)
Why did you quit?

(Lim Chung-eui)
A close friend in the newspaper was a reporter for cultural events. A close friend in the newspaper was a reporter for cultural events. I was particularly close to Han Dae-soo. He studied in the U.S., so spoke a good English. He was caught by the police for being a hippie in the airport on his way back to Korea. He might be the first hippie in the country. He is now a singer. He was organizing a project for the 30th anniversary of Korea’s independence from Japan. The opening was on August 15, 1975. I didn’t know about the venue, which was SPACE. I was mentioned since April. So I went to SPACE building, built with black bricks. I had no idea about what SPACE was doing. I thought about my participation for a month. The building was so fabulous. But I would need to produce about 10,000 images. There were five sections for those images. My salary at the newspaper was around 55,000 and 66,000 Korean Won. The major newspaper companies paid around 50,000 Korean Won then.

So I suggested 150,000 Korea Won for the project, which was two to three times bigger than my salary. But the manager at the top level was paid 120,000 Korean Won at the time. They suggested 100,000 Korean Won since I was a new face. I couldn’t go home at night every two days for the next three months. At first, I was asked to shoot an image of the SPACE Theater. Then I had to take a photo of a Changamjang Residence. It is similar to Frank Lloyd Wright’s ‘Falling Water’ building. The building is on a rock, and there is a stream. They told my architectural photography was good. They said, “It’s good.” Then, I was suggested to pursue architectural photography. I was not sure whether it would make any money, but I did since someone had to do it.

Murai Osamu, a famous Japanese architect, was also invited to the project. I couldn’t take photos with him, so I marked on the floor plan and did the shooting later. I showed him my photos when he visited Korea afterward. He was surprised then. He was surprised to see my development. Then he recognized me as a good photographer. He encouraged me a lot. We had many conversations.

충무로 3가 58-1번지 일거야. 거기서 사무실을 하나 만들어가지고 건축사진을 한다고 폼을 잡았는데, 충무로에도 어느 정도 이미지가 알려 졌고. 뭐 임정의로 하냐, ‘임정의’ 너무 좀 내가 너무 내색하기가 좀 약간 껄끄러운 것도 있어. 뭐 별로 잘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이왕이면 이름을 바꾸자. 청암을 쓰자. ‘청암건축사진연구소’.아버님 호에요. 사실. 아버님의 대를 이어서 한 번 해보자. 이래 가지고 그렇게….그래도 한 번 해보자, 그래 가지고 시작을 한 게 대우에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해외프로젝트가 많았다고. 78년, 79년, 80년 요 사이에 계속 중동 붐이란 게 있잖아요.

수단에 <영빈관 프로젝트>야. 대통령 영빈관이 큰 거거든. 그 대우하고 수단하고 좀 가까웠나봐. 옛날에 일을 해외 일 많이 했어, 사우디, 이라크, 이란 하는데, 그 중에서 수단 대통령 궁 하는데 그 사진을 찍어 주니깐, 처음에는 대우그룹에서 사진 찍었는데, 다 빠꾸(거절)를 맞았나봐. 이 분이 좀 건축가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들었나봐, 사진이. 그래 가지고 사진을 딱 다 폐기하고 다시 찍어달라고 그래서 했는데, “마음에 든다. 너무나”, 건축가 입장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걸 많이 사진으로 표현을 하다 보니까 “앞으로 계속유지를 좀 합시다.” 그 상대방에 프레젠테이션 하기 위해선 사진이 굉장히 역할이 컸어요.

My office was in 58-1, Chungmuro 3-ga. I told the others that I was doing architectural photography. I was known in the scene then. And I didn’t want to put my name at the front. I thought I was not that good. So, I decided to put change the name. ChungAM was the new name. Studio ChungAM. It’s my father’s pen name. It was to show my will to continue my father’s legacy. I started working on the overseas construction projects by the Daewoo Corporation. There was a boom in the Middle East between 1978 and 1980.

The company built a presidential reception house in Sudan. Daewoo also did many projects in Saudi Arabia, Iraq, and Iran. This time it was for Sudan. I did it for the presidential residence as well. The photos by a person hired by Daewoo were all rejected at first. The architect didn’t like them. So I was commissioned once again. The architect didn’t like them. So I was commissioned once again. I was appreciated by the architect since I understood his thoughts and take photos. Photography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presenting ideas about buildings.

그때는 건설사가 주(主)였어요. 그때 또 하나 그 행정수도 라고 있어요. 대한민국 박통(박정희대통령)이 계획을 했는데, 그걸 30개의 건설사에다가, 지명을 딱 해 가지고 만들어 와라, 안(案)을. 저는 처음에는 김종성 안을 했는데 그 분이 어떻게 연석회의 가끔 만남을 가져 가지고 “이 작업을 임모라는 사람한테 맡겨야 한다.”고 또 이렇게 주문을 했나봐. 그래갖고 그때 경제수석이 오원철 수석비서가 일을 맡아서 했는데, 경제수석이죠. 그때 ‘중화학기획단’ 만들어가지고 지시를 내린 거야, “이거를 임정의라는 사람한테 맡겨라”, 그 작업을 내가 다 했어. 그 모형 30개를 다 찍고, 어, 그때 엄청 바빴죠. 그렇게 이 컴피티션(competition) 이런 일들이 제일 왕성하게 일어났었던 시기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얘기시군요. 하여간 그거를 올림픽 유치하기 위해서 아시안게임, 그 보고서를 만들어야 돼. 올림픽 위원회에서 이 작업을, “한국에 무슨 시설이 있냐? 한국을 어떻게 믿냐?” 이걸 사진으로 만들어야 될 거 아니야. 서울에 뭐 보조경기장 뭐 다 찍었어요, 그걸 첨부해서 바덴바덴(Baden Baden)에 가지고 갔잖아요.

(정주하)
그게 몇 년돈가요?

(임정의)
그럼, 80년대 초반인데 내가 그때 뭐 다 그거 뉴스에 나오는 건데. 엄청 좋아했지. 그 다음부터 인제 서울이 바뀌기 시작하는 거야. 재개발이 많아지는 거야. 노후 된 거 다 때려 부수고, 쫙. 꼼뻬를 엄청 많이 해요, 아니 내가 저 미안한 얘기지마는 더티(dirty)한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다 잘라 버렸어, 매너가 좀 안 좋은 사람한테는, “딴 데 가라고”. “야, 나는 업자가 아니다. 니네의 일을 내가 더 돋보여주고 하는데 서로 피프티(fifty), 피프티, 서로 이렇게 좋은 교류가 있어야지.”

The construction companies were my main clients. Another project was the proposals for an administrational capital city. The president ordered 30 construction companies to submit proposals. I did photos for Joung Sung Kimm at the start. But then, he mentioned me in a big meeting. Then, the head of the economic affairs made an order after establishing an organizing committee. Then, the head of the economic affairs made an order after establishing an organizing committee. I did photography for all the 30 proposals. I was really busy. I did photography for all the 30 proposals. I was really busy. Between the late 1960s and the early 1980s was the height of architectural competitions. Between the late 1960s and the early 1980s was the height of architectural competitions. The Korean government had to produce a report of the Asian Games. The Olympic Committee wanted to see photographic images of facilities in the country. I took photos of all the sports facilities in the city of Seoul. The images were taken to Baden-baden.

(Jung juha)
Which year was it?

(Lim Chung-eui)
It should be in the early 1980s. You can check it in the news. The committee liked what they saw. Seoul was recognized after that. Many redevelopment projects were done. Old buildings were demolished for the new ones. There were a lot of architectural competitions. I’m sorry to say this, but I refused to work for dirty players. I just told them to work with another photographer. “”I’m not working only for money.” “There should be an equal exchange.””

(정주하)
그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꼼뻬, 즉 그 컴페티션에 나가야 되는 모형을 찍는 사진 스킬이 혹시 다른 것을 찍는 것과는 다른 어떠한 그런 기술이나 방법들이 있었는지요?

(임정의)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사진가 입장보다는 건축가가 어느 정도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걸 표현하는 방법이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건축가하고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고 원하는 걸 대게 알면 이 건축 관련된 거는 딱 기본이 있어요. 계획하려면 투시도를 그리고, 조감도를 그리고, 그런 작업이 일단 선행이 되요. 약간 그걸 비슷하게 사진하고 접목하면 되는 거예요. 근데 조명을 이렇게 후라뜨하게 뭐 스튜디오 가면 이렇게 많이들 하는데, 내가 충무로에서 시작할 때 그런 작업을 메인 조명 하나만 써요.

태양은 하나다. 음영이 있어야 되요. 빛과 그림자가 이게 떨어져야 되는데, 대게 사진하는 사람들은 그냥 후라뜨하게 찍더라고. 조명 양쪽에다 하고, 뭐 이런 식으로 하니깐 칼라풀하고 좋아요. 근데 내 사진은 좀 강한 편이거든. 명암이 이렇게 있거든, 항상. 그러니까 태양이 지며는 당연히 어두워지는 부분이 잘 안 보이겠지만, 살짝 램프를 주면서 약간 살리는 방법도 있겠지마는, 가급적이면 좀 강한 사진을 많이 만들어 주다 보니까 좀 약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Jung juha)
Was there any particular skill needed for models submitted to architectural competitions?

(Lim Chung-eui)
It’s not about a particular skill but how to express the architects’ thoughts. For that, you would need to talk with the architects a lot. If you understand what they want, there is a basic rule in architecture. Architects create plans and perspective drawings. You just have to apply it in photography. People use many lightings for this kind of photography, but I use only one main lighting.

There is only one Sun in the sky. There should be shades. Light and shade should be separated, and I saw many photographers not separating them. Their photos are as flat as they are colorful. But my photos always have a strong contrast. It might be possible to reduce the shade by using some lighting. It might be possible to reduce the shade by using some lighting. But I rather prefer a strong contrast. Some people don’t like my photos.

80년대 초에,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이 있어요.특강을 하러 갔다고. 그 사진도 딱 보여주고 하는데 어우, 사진이 멋있데. 그 작업을 하는 게 있었데, 거기서 무슨 오더를 ‘저소득층의 주거지형태 연구’, 그걸 하고 있는데 그걸 좀 도와달라고 그러더라고. 알았다고. 그러면 대학원 애들하고 같이. “야! 니들 조수니까 따 라붙어”. 그래 가지고 서울에 봉천동, 난곡동, 금호동, 신당동, 중림동 하여간 서울에 있는 달동네를 저소득층이겠죠, 그걸 작업을 내가 다 했어요.엄청 많이 찍었지. 그랬더니 사진이 너무 좋은 거야. 그때 작업해가지고 그 후에 책이 나왔을 거야. 아마.

사실 언젠가는 이게 탈바꿈 되는 과정이고, 이건 참 그 분들이야 사실 정말 살아가는데 굉장히 힘든 사람들이에요. 그니깐 자기 거처, 금호동, 예를 들어서 한 번 가보며는 그 산동네에 어우, 낙산 가보며는요, 옛날에 아파트도 있고 그 언덕길 저도 옛날에 경험했지마는, 60년대, 금호동에 살 때요. 참 어려워요. 근데 그 사람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니깐 입장을 반대로 생각하면은 증말 끔찍한데 제가 할 일은 뭐냐 하면 이 기록이라도 남겨놓자. 이 없어지니까. 저는 없어질까봐 그걸 사진이나마 남겨 놓는 거예요.

I visited the Graduate School of Environmental Studies at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in the early 1980s. I showed my photos. They liked it. Then I was asked to work with them. They were doing a commissioned research on the types of residence among low-income households. So I started working with them. Some graduate students assisted me. Bongcheon-dong, Nangok-dong, Geumho-dong, Sindang-dong, and Junglim-dong. I took photos of all of them. I took a lot of photos. And they were really good. There should be a book with those photos.

The redevelopment was part of the eventual change. The residents were living through difficulties. I also experienced difficulties when I lived in Geumho-dong in the 1960s. But it’s a really tough environment. And it was impossible to imagine the resident would move to other places. It was cruel from their perspective, but I had to leave the record since they were to be eradicated. I left photos as a way of keeping them.

제가 인제 건축물을 주로 사진을 작업하다 보니까 근대의 유산에, 하나에 포함되는 조선총독부 일제시대때 한 건데 저는 오래전부터 아버님 사진 보면서 그래도 나도 글쎄 언젠가는 기록을 해 놔야겠다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쭉 해 왔어요. 뭐 하여간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거기 경복궁도 가고 하는데, 정치적인 또 뭐 이런 것 때문에 좀 약간 철거한다는 얘기를 듣고 좀 마음이 아팠는데, 그 전에도 많이 찍었어요, 그냥 뭐 철거하는 건 다 기록을 했어요. 저 나름대로 저는 주로 80년대 초반부터 그냥 이렇게 준공되는 건물이 있다던가. 그러면 을지로 2가 재개발을 한다, 그러면 그걸 원경으로 찍어 놔요. 판잣집 같이 인쇄골목 많잖아. 지금은 건물 다 섰지마는, 중요한 거는 이게 언젠간 또 없어질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찍어 놔. 그 서울에 뭐 종로니, 청계천이니 많이 찍어 놔요. 근데 그걸 정리할 시간은 없어요.

I also took photos of the Japanese General Government Building in Seoul, which was a landmark from the modern period. I had been recording the building since I saw my father’s photos. I had been recording the building since I saw my father’s photos. I visited the palace once or twice a year. I felt sorry to hear about the demolition of the building, which was done with a political background. I recorded the process of demolition as well. Since the 1980s, I have been recording distant views of planned redevelopment sites and new buildings. Places like makeshift houses and printing shop alley, which are all changed into big buildings. They will also be gone some day. So I take photos first. I take so many photos of Chunggye-cheon and Eulji-ro. There’s no time for organizing the photos, though.

상업건축에서 호텔, 레스토랑, 일식당, 한식당 이런 거가 다 연관되는데 그런 것들을 이해를 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좀 건축적으로 약간 공부를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진에서 평면작업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빛을 이용한, 평면에 입체를 넣어 가지고 어떻게 만들어주는데, 이 건축은 공간이란 말이야, 공간. 공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또 흐름의 동선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이해해야 되는 게. 상업사진에서는 다 인조로 한다고. 조명하고 막 그런다고. 그거는 좀 아니거든요. 자연에 여건, 자연 빛, 이거를 최대한도로 이용해요. 저는 조명을 써본 적이 백에 한두 번 있을까, 없어요. ‘사진은 테크닉을 배우면 안 된다.’ 그거는, 보는 눈을 가져라.’ 그 눈 뜬 장님이 되지 마라.’그 인간관계, 관계, 자연과 건축이다. 이 관계 아니에요. 사람도 혼자는 안 된다. 여기서 100프로(%)로 건축가가 되지 말고 여기서 정치도 할 놈이 있어야 된다. 그게 정치하고 연결되고, 또 기업 장이 되고 약간 틀려야 돼요. 다 똑같이 하면 좀 발란스가 안 맞을 경우 있거던. 그 사진하는 애들도 나와요.“야, 대학원까지 나와서 무슨 사진이냐. 제발 하지 마. “”힘들어.” 어유, 그래도 하겠대요.” 그게 지금 한 서너 명 잘나가는 애도 있어요.

(정주하)
건축사진으로요?

(임정의)
아우 뭐 전시도 하고, 사진도 잘 팔아먹고, 하여간 뭐 기특은 한데 음, 인간관계를 말했지. 내가 아직 인간이 들된 게 뭐냐면 이게 너무 사회하고 안 맞어. 애들한테는 그런 걸 좀 만들어 주고 싶은 생각도 있어가지고.

The commercial buildings are all related in a sense, but we have to understand the need to study architecture. People consider photography as a kind of art on a flat surface, which employs light. Photography represents a three-dimensional space on a flat plane. But architecture is about space. It is about how to interpret a space and the flow of movement. Commercial photography uses artificial lightings a lot. I don’t think the way it should be. I use as much natural lighting as possible. I rarely use any artificial lighting. I think that one should not learn the technique of photography. One has to have a perspective. One should not become a person with unseeing eyes. It’s all about relations between different things. Humans cannot do anything by themselves. I tell my students that not all of them should to the same job. Some have to do politics, others should run companies. There should be diversity. Keeping the balance is important. Some pursue photography. I tell them, “Don’t do photography.” “””It’s a difficult job.”” But some insist doing it.” Three or four are doing really well now.

(Jung juha)
In the field of architectural photography?

(Lim Chung-eui)
Yes. They have exhibitions. They also sell very well. I appreciate them. But I want to help them. establish good relations. I still don’t fit the society. So I want to help them in that resp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