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MMCA
✍️ 김중업 다이얼로그 | 곽재환(건축그룹 칸)
2018
Client 국립현대미술관 MMCA
Project ✍️ 김중업 다이얼로그 | 곽재환(건축그룹 칸)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Gyeongnam Culture & Art Center, 1984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김중업 다이얼로그
2018.8.20 – 12.16

학예연구사 | 정다영
총괄 프로듀서 | 이성민 (삼삼오오)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Gwacheon)
Kim Chung-up Dialogue
2018.8.20 – 12.16

Curator | Chung Dah-young
Executive Producer | LJSUNGMIN (THREESFIVES)

작업 소개

김중업 다이얼로그 전시의 협력 기획 및 구성을 진행한 삼삼오오 이성민 총괄 프로듀서의 섭외로 전시에 참여하였다. 김중업 아카이브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영상 작품과 함께 작업한 동료 건축가, 작가, 평론가 등을 인터뷰한 시리즈 영상을 전시장에 상영하였다.

곽재환 건축가는 현재 건축그룹 칸의 대표로 김중업과의 인연으로 건축계에 입문하였다. 장충동 사무실에서의 추억을 시작으로 김중업과 함께했던 건축 여정을 말한다.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다 인간적 차원에서 사회적 이슈를 함께 고민하고 함께 발언하며 건축가가 할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건축가의 자세, 이런 부분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고 그런 모습이 좋았어요.’

‘If so, what’s the role of architects in the human-nature relation before mediation? It’s the architect’s stance and praxis of pondering on and speaking out together about social issues on a more human level.I was influenced a lot by that and liked it.’

곽재환 (건축그룹 칸)
Kwak, Jae-Hwan (Architect Group C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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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

Executive Producer: LJ SUNGMIN(THREESFIVES)
Coordinator: Cho Hyun Dae
Translator: Kim Yoo-suk
French Proofreading: Yang Jiwon

Film by 57STUDIO
Director: Lee MeeJee
Camera: Production KEZR (Kim Sangil, Kwak JaeMin, Kim SangHyuk, Um JunHo)
Your Photographer (Jun SangJin)
Jang JiNam
Edit/D.I: Lee MeeJee
Music: Jeong JinHwa

Image materials courtesy of the Kim Chung-up Architecture Museum, KBS, Korea TV

프로젝트 내용

《김중업 다이얼로그》전은 한국 현대 건축의 신화적 인물인 건축가 김중업을 조망한다. 하지만 이 전시는 그동안 김중업에 관한 피상적인 진단과 신화화된 측면과는 거리를 두고, 예술과 건축의 관계를 매개로 그동안 논의되지 않았던 다양한 맥락 속에서 작가와 그가 남긴 유산을 살펴보는 전시다. 김중업의 타계 3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이 전시는 한국 현대 건축 전시를 꾸준히 기획해온 국립현대미술관이 김중업건축박물관과 공동으로 준비했다. 건축가 김중업의 생애 전반을 조망하는 첫 대규모 전시로서, 김중업건축박물관의 소장품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아카이브, 그리고 건물주로부터 대여한 자료들과 사진 및 영상 신작으로 구성했다.

1922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 아틀리에에서 실무를 한 뒤 한국전쟁 이후 초토화된 한국 땅에서 한국적 모더니즘을 구현하고자 한 건축가다. 그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만난 예술가들과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국 문화예술계 중심에서 활동하며 예술가 들을 후원하고, 그들과의 협업을 오랜 기간 진행했다. 한국에서 최초의 건축 전시회를 열기도 한 김중업은 전시라는 문화양식을 일찍부터 이해하고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건축을 건물로 한정하지 않고 담론의 문제로 보고 예술매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진행했다. 그러한 사유의 흔적은 그가 남긴 이미지 아카이브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김중업 다이얼로그》전은 역순으로 진행되는 김중업의 작품 연대기를 첫 번째 대화의 시작으로 연다. 그리고 ‘세계성과 지역성’, ‘예술적 사유와 실천’, ‘도시와 욕망’, ‘기억과 재생’ 등 4개의 주제로 그간 김중업과 그의 작품에 관해 주변부에 머물렀던 문맥들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그간 논의가 부족했던 김중업의 후기 작업들과 한국의 중요한 예술가들과의 협업 과정, 도시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이제 막 촉발되기 시작한 한국 건축가 연구의 출발점으로서 건축, 예술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관계망들과 대화의 장을 여는 단초가 되리라 기대한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전시소개글

1980년대 김중업 건축사무소의 풍경

그 당시 선생님이 장충동에 계셨는데, 그 장충동 사무실이 선생님이 예전에 설계를 했던 건물이에요. 그 건물의 지하층을 개조해서, 주차장으로 썼던 지하층을 사무실로 하고 그 위층에 선생님이 계셨어요. 살림집으로 쓰셨는데, 그 사무실에 직원이 네 명, 다섯 명 정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들어가서 계획안으로 설악레저타운을 했던 것 같고, 그 다음에 장안 재활원을 했던 것 같고, 그 다음에 육군박물관을 진행했었고. 그 다음에 현상 설계들을 좀 했던 것 같아요. 경남도청사인가, 또 부산문화회관인가, 그 다음에 진주문화회관, 경상남도문화회관 또 충혼탑 그 정도가 기억이 납니다, 교육개발연구원, 그 이후에는 을지로 재개발, 사직동 주택이 기억이 나고. 성북동 지은이네 집 주택도 기억이 나고요. 군산문화회관, 또 여성회관 그리고 이제 평화의 문 마지막에. 그 전에 목포방송국도 있었고, 태국대사관도 있었고

태양의 집

시장이죠. 시장 프로젝트인데 그 시장이 구 시장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에 걸맞지 않다, 하면서 선생님이 건축주를 설득해서 마켓으로 제안했고 태양의 집이라고 명명을 해서 하나의 마켓으로 실내화한 시장이 된 거죠. 선생님의 안을 보면 곡선과 예리한 사선으로 이뤄졌어요. 그 시장을 하나의 축제라고 해석해서 왁자지껄하고 어린 아이와 어머니가 손잡고 가서 머물면서 장터에 있는 그런 풍경을 하나로 도면화한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Kim Chung-up Architectural Firm in the 1980s

Back then, Kim’s office was in Jangchung-dong. He’d designed the building earlier. Formerly a garage, the basement was remodeled into an office, and he used the floor above as his home. Around 4-5 people worked in the office. After joining, I worked on the plan for the Seorak Tourist and Leisure Center, then the Jang-an Rehabilitation Center, then the Korea Army Museum, then some prize design contests. I also recall the Gyeongnam 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Busan Cultural Center, Gyeongnam Culture & Art Center, and Busan Memorial Tower for Patriots, that’s about it. After the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I recall the Eulji-ro 2-ga 16,17 District Redevelopment, a house in Sajik-dong, and Ji-eun’s house in Seongbuk-dong. The Gunsan Culture Center, Gunsan Women’s Center, and, before the Olympic World Peace Gate, there were the Mokpo Munhwa Broadcasting Corporation and Embassy of the Republic of Korea in Thailand, too.

Shopping Center Sun’s Palace

It was a market, a market project. But saying the concept of traditional markets was outdated, Kim persuaded the building owner to accept a modern market. Naming it “Sun’s Palace,” he created an indoor market. His plan consisted of curves and sharp diagonal lines. Interpreting the market as a boisterous festival, he seems to have imagined a scene where a child plays at a market with the mother, hand in hand.

태양의 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램프에요. 외곽에서 몇 층 되다 보니까 자유롭게 접근해야 하거든요, 모든 사람이. 지금에야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그 시점만 해도 그렇게 보편적이지 않았으니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램프로 계획한 것이 시각적으로 굉장히 강렬하죠. 붉은 벽돌로 되어 있는 벽과 창문에는 상당히 루이스 칸의 영향이 있다고 봐요. 벽돌의 디테일과 창의 형상 이런 것들이. 근데 그것들이 끝에 가서 아주 예리하게 끝나는데, 실내를 형성하는 곡선으로 이뤄진 그것들이 대립(콘트라스트)을 이루면서 강한 조형적 메시지를 던져주죠. 그런 것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켓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부여하면서 다가올 수 있도록 유인하는 건축적 몸짓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바다호텔

바다에 큰 배를 하나 띄워 그 위에 피라미드 같은 원추형의 호텔을 계획하셨으니까 그것은 기술력이 없으면 불가능하겠죠. 그 뒤에도 그걸 특허를 내려고 상당히 애를 쓰셨어요. 그 구조에 대한 것이죠. 큰 메가 스트럭쳐예요. 큰 부력을 갖고 있는 것에 원추형이니까 양옆에서 끌어올려진 구조가 위에서 결합해서 중앙은 크게 비워내는 거예요. 현대 기술이란 바탕이 없으면 구현할 수 없는 것이겠죠.

The most impressive part of Sun’s Palace is the ramp. Nowadays, elevators are universal, but they weren’t so common back then. So, to be freely accessible to many, it was planned as a ramp, which is very powerful visually. The red brick walls and the window design, the bricks’ details and the windows’ shapes, seem to have been influenced by Louis Kahn. Some parts finish very sharply. Contrasting with curves forming the interior, they convey a powerful plastic message. Such elements seem like architectural gestures, giving passersby a powerful image of a market and enticing them.

Plan for the Bada Floating Hotel

Kim planned to launch a big ship at sea and build a pyramidal cone on it. It’d be unrealizable without the technology. a patent on the megastructure. It’s a conical structure on a buoyant foundation. A slanted structure along the circle raised from both sides unites at the top, leaving a big hollow space in the lower center. It’d be unrealizable without modern technology.

설악 레저 타운

설악레저타운에 호텔 등 여러 동들이 있고, 여러 가지 리조트, 방갈로 등 많은 시설들이 있었는데 그 때 제가 맡은 건 원형으로 된 호텔 부분이었습니다. 다각형이라고 해야겠죠. 다각형으로 된 안을 계획했는데, 이런 언덕이 있으면 그 끝에 인공호수가 연결되도록 끄뜨머리에 배치를 하고, 여기 상부 다리를 통해서 들어가는 계획안이었어요. 제 설명을 다 듣더니, (선생님께서 “결국 자네 입에서 그 말이 안 나오는구먼.” 하시더니), “나 같으면 이걸 번쩍 들어서 이 물 위에 세우겠네.” 이 말씀을 하는 순간, 저한테는 죽비로 때리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 당시 나의 의식이라고 하는 게 물과 뭍이라고 하는 경계 즈음에서 뭍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지. 건축물이라고 하는 것은 땅에 세워야만 된다는 의식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죠. 물에도 세울 수 있는 거죠, 다리 교각을 세우듯이 물에 세울 수 있는 게, 물에 세운다면 투명은 더 말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접근할 때는 배를 타고 접근해 들어가기도 하고 그 낭만적인 생각이 확 더 열리는 거였죠.

진주문화회관

1980년대에 각 지역마다 문화센터가 들어서는 게 일이었죠. 상당한 프로젝트가 많이 나왔는데 그 당시 김중업 건축연구소에서 참여했던 것이 1981년 진주문화회관, 그것이 현상설계로 나왔어요. 진주성 내에 첫 현장(사이트)은 성내였습니다. 김수근 선생의 박물관이 있어요. 유물 보관하던 전시장이 있는데, 한 사이트에 문화센터를 지어야겠다는 지침이 나와서 여러 가지 고민들을 했죠. 진주성 외곽 금강 변에 땅이 바뀌어서…. 지금 현재 세워져 있는 것이 선생님이 스케치를 하신 것이에요. 선생님의 조형 언어를 유감없이 드러낸 안이었죠.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느냐하는 시각에서 안을 잡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Plan for the Seorak Tourist and Leisure Center

The plan for the Seorak Tourist and Leisure Center included many facilities like a hotel, a resort, and bungalows. I was in charge of the circular hotel back then. I planned the hotel as a polygon. In the plan, I placed the hotel by the water so that it’d be linked to the manmade lake below the hill, and you’d enter it through a bridge on the hill. After hearing my explanation of the plan, Kim said, “So you don’t mention it after all” and “I’d raise the hotel and erect it over the water.” When I heard it, it was like being hit with a bamboo clapper. Back then, my awareness was limited, remaining on the land in terms of the boundary between the land and the water, only thinking buildings must be built on the ground. But you can raise them over bodies of water, too. If you erect the hotel over the water, as with piers, You’d not only have its reflection on the lake but also be able to approach it by a boat. That romantic idea suddenly opened up for me.

Gyeongnam Culture & Art Center

In the 1980s, culture centers were built everywhere. So there were many projects, and, in 1981, the Kim Chung-up Architectural Institute took part in the Jinju Culture Center (Gyeongnam Culture & Art Center), which was in a prize design contest. The first site was in the Jinju Castle compound. It had a museum designed by Kim Swoo Geun. It was an exhibition hall for storing artifacts. The guideline was to build a culture center on the same site, After we won the contest, the site was changed to land by the Nam River outside the castle. Kim sketched the building that stands now. The draft fully revealed his plastic language. He seems to have drafted the plan in terms of harmonizing the building with the landscape around.

을지로 재개발 계획

1983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제가 중동에서 돌아왔을 때 현상설계가 있었어요. (그것도 역시 제가 안을 잡았어요.) 세 군데가 선정되어서 각기 하나씩 나눠서 하기로 했는데 저희가 된 것이 중소기업은행 본점, 유리로 되어 있는 것을 하게 되었죠.

부산 충혼탑

저하고 답사를 했을 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황룡사의 9층 석탑, 그 9층이 매 층마다 의미가 있다 하셨거든요. 그 당시 아홉 가지를 빌기 위해서 9층 석탑을 세운 건데, 이것을 아홉 개의 방향, 열주가 아홉 개의 방향입니다. 열주 아홉 개를 두고 사방팔방 더 남아서, 의미를 더 부여할 수 있겠죠. 그래서 선생님께서 아홉 개의 점을 찍어주셔서 그걸 가지고 제가 발전시켰어요. 그걸 올리고 삼륜부를 만들고 그렇게 했죠.

Eulji-ro 2-ga 16,17 District Redevelopment Plan

It was around 1983. When I returned from the Middle East, there was a prize design contest. Three firms were chosen for their plans, so each tackled one building. We were assigned the main branchof the Industrial Bank of Korea, the one made of glass.

Busan Memorial Tower for Patriots

On a field survey, Kim said each floor of the 9-story pagoda at the 7th-century Hwangnyong Temple had meant something. The pagoda had been built to reflect nine wishes. Modifying it for our tower, I placed columns in nine directions. They were meant to honor the souls in the Nine Heavens of those who’d perished defending the nation. Kim marked nine dots for the columns, which I developed. We raised the columns vertically from them and made the finial.

평화의 문

1985년도에 현상설계로 나왔는데, (그 안을 제가 잡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 저의 생각은 모든 기념비라고 하는 것이 나올 때는 ‘88올림픽 상징 조형물’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에요. 88년이라고 하는 것, 올림픽을 유치한 것이 우리나라 큰 역사 속에서 하나의 큰 결절점이 되는 것이 아니겠나, 그래서 이 결절부에 하나를 세우고 이것을 통과해서 큰 마당을 열고 그 뒤에 몽촌토성이 있는 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여백으로 두자, 그래서 그 결절부에 제 생각은 연, 날개를 띄우는 것이었어요. 현대 과학으로 가능하다면 자력의 음극과 양극을 대비시켜서 강력한, 띄워서 그야말로 기둥없이 날개를 띄울 수만 있다면 어떻겠나, 그 시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할 정도로 하나의 날개를 띄우고 싶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에 5000년 우리 민족의 염원을 날개에 담아서 띄운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실제로 띄울 수는 없으니까 그 받침을 세우게 되었고, 받침을 세우니까 하나의 문의 형상을 띄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전체적인 형상에 그 때까지 선생님이 추구해왔던 건축 조형 언어, 곡선과 예리한 사선, 예각이 결합된 그런 조형언어를 구현했고, 또 선생님께서 항상 말씀하신 게 고구려의 호연지기,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했던 기상과 샤머니즘에 대한 우리 민족의 원류와 같은 힘 같은 것들을 많이 말씀하셨어요. 그런 것들을 나름대로 구현해본 것이죠. 연결한 부위에 오륜 마크를 붙이게 되었는데 그 하부 천장부에 사신도를 넣자, 고구려 문화의 상징적인 하나의 염원 아니냐. 그 사신도를 초기 계획안 때는 현상설계 때 안을 잡다가, 백금남 씨, 성균관대학교 그 분한테 부탁드렸죠. 양 옆으로 조명등, 그 상부에 있는 탈을 이승택 씨가 맡아서, 탈을 그린 것을 제가 갖고 있어요. 나름대로 조화를 잘 이뤘다고 봐요. 현상설계의 지침에 파인 아트 등 여러 장르를 결합해서 했으면 좋겠다는 지침이 있었어요.

Olympic World Peace Gate

In 1985, there was a prize design contest for a “Symbolic Sculpture of the ’88 Olympics,” and I began to draft the plan for it. Hosting the ’88 Olympics would be a great milestone in Korea’s long history. So I thought of erecting a monument at the node of the site, and opening up a big square through it, with the 3rd-century Mongchon Earthen Fort behind as the backdrop and the big square left empty for later generations. At the node, we’d set up a kite or a pair of wings to reflect wishes. If it was possible with modern science, We’d launch wings, literally without columns, using the strong repulsive force of magnetism to give wings to Koreans’ wish, to let it soar. But because it wasn’t possible, we had to erect supports. Because we had supports, the monument became door-shaped. I realized the overall shape through a combination of curves, sharp diagonal lines, and acute angles, which was the architectural language pursued so far by Kim. I thus realized in my own way the strong spirit and vigor of the ancient Korean kingdom of Goguryeo and the originary power inherent in Korean shamanism, which Kim always spoke of. We put the Olympic rings on the part linking the two wings. On the
bottomof the ceilings, we put a Four Symbols painting, which is representative of Goguryeo mural paintings.After winning in the prize design contest, we asked Professor Paik Kumnam at Sungkyunkwan University to work on the Four Symbols painting. Installation artist Lee Seung-taek did the masks on top of the columns, or lights, on either side of the gate. I still have the drawings of the masks. The work is harmonious in its own way. The guideline of the prize design contest back then wanted a comprehensive combination of diverse fine art genres.

교육개발원

교육개발원은 선생님이 처음 안을 잡으신 거예요. 선생님이 잡은 안은 지금과 같은 것은 아니고 계단실 있는 부분이 다 사선으로 내려왔던 것이에요. 계단실 부분만 사선이고 나머지는 튀어나온 형상이 되었는데, 그건 선생님이 안을 잡으셨다가 발전시킨 것이죠. 선생님은 조형 언어로 상당히 유기적이고 자유곡선을 많이 쓰셨는데, 교육개발연구원은 기하학적이 선들이 꽤 있었던 것 같아요. 두 개가 올라가서 풍량 같이 달려 있는 것 빼고는 나머지 구조적인 선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것도 저는 루이스 아이칸의 영향이라고 봐요.

김중업 건축가

건축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이상적으로 결합하는가 하는 매개물의 역할이지, 궁극의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매개 이전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다 인간적 차원에서 사회적 이슈를 함께 고민하고 함께 발언하며 건축가가 할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건축가의 자세, 이런 부분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고 그런 모습이 좋았어요. 선생님의 그 부분 때문에 해외에서 방랑의 길을 걷고 그 이후에 좋은 작업을 할 기회를 많이 놓치셨지만, 그건 우리나라의 큰 불행이에요. 하지만 건축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저한테는 큰 가르침이었고 또 많은 후배 건축가들이 그런 부분을 본받아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New Annex,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Kim drafted the plan for the new annex of the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His first draft wasn’t like the building as it is now. The whole left side, with the stairwell, used to descend in a diagonal line. Now, only the stairwell is in a diagonal line and the rest, which is the office, juts out. They were his developments according to the required programs. His plastic language was very organic, and he often used free curves. The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has many geometric lines. Except for stuff like the rooftop wind vanes, you see them a lot in the remaining structural design. They, too, seemed like Louis Kahn’s influence.

Architect Kim Chung-up

In the end, architecture is a medium for the ideal combination of nature and humans, not the ultimate goal. If so, what’s the role of architects in the human-nature relation before mediation? It’s the architect’s stance and praxis of pondering on and speaking out together about social issues on a more human level. I was influenced a lot by that and liked it. Because of that aspect, Kim had to wander abroad and missed many chances at good projects later. That was a big misfortune for South Korea. But it was a great lesson for me that architects must live like that, and many younger architects should emulate it in their l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