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 아시아의 사진 : 정정회 구술사
2014
Client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Project ✍️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 아시아의 사진 : 정정회 구술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아시아의 사진 : 정정회 구술사
2014

Asian Culture Center
Archive & Research
Photography in ASIA : Oral History Cheung Jung Hoi
2014

작업 소개

이 컬렉션은 ‘아시아의 사진’ 아카이빙 프로젝트의 한국에 관한 자료 컬렉션 중 하나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의 원로 사진가들의 생애사에 대한 구술을 기록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한국 사진사의 부족한 서술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사진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서울 지역 주류 사진계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정리되고 있는 반면, 사진계에 충분한 자료를 남기지 못했거나, 서울 이외의 지역 사진가들은 상대적으로 여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예술사진 영역이 아닌, 실용적 영역에서 활동했거나, 지역에서 활동한 사진작가들을 적극적으로 포괄하였다.

정정회 구술사
Oral history Cheung Jung Hoi

강봉규 구술사
Oral history Kang Bong-gyu

김한용 구술사
Oral history Kim Han yong

임정의 구술사
Oral history Lim Chung-eui

크레딧 보기

크레딧:

구술자 : 정정회
아시아의 사진_구술채록 책임연구원 : 정주하
아시아의 사진_구술채록 연구원 : 유지의,현지연
정보원 예술감독: 김선정
진행: 정주영, 노해나
영상 및 음성기록: 스튜디오 것(윤유성)
영상 구성 및 편집: 57STUDIO(이미지)
번역: 박재용
자료협조 : 정정회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주관: 아시아문화개발원 정보사업팀

‘아시아의 사진’은 사진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근현대사를 조망하는 컬렉션으로 아시아 사회, 정치 및 문화를 기록한 4명의 사진들과 사진가들의 구술 채록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은 아시아가 근현대를 거쳐 오면서 사회와 문화를 기록해 온,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수십 년 전의 도시 공간, 건물, 공장, 광고사진, 보도사진은 이제 사실성을 전달하는 임무에서 벗어나 당시 문화와 역사를 기록한 시대상의 보고로 인식되고 있다. 수집된 컬렉션은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근대의 격변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또한 원로 사진가들의 생애사 구술 채록 영상은 생생한 증언을 통해 사진 기록의 서사적 공백을 보완해 줄 것이다. 향후 대만,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전역으로 수집 범위를 확장하여 아시아 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출처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 문화예술 전문 주제 아카이브 전시’’ 中 ‘아시아의 사진’ 전시 소개글

(정정회)
부산은행에 입사를 하게 됐습니다. 입사를 했는데, 음, 68년이구나, 그래 입사를 했는데 입사를 해 가지고 이제 은행에 또 열심히 다녔어요. 사진 찍을 생각은 못 했고 그때는 아예 사진 찍을 생각은 못했고, 팬탁스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기념촬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카메라였고, 생각지도 못했죠. 은행에 들어가 가지고 근무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인사부장이 날 찾는다고 연락이 왔어요. 사진 사자도 모르는 사람보고 맡아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거예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 집에 와서 잠도 못 자고 이래 있다가, 그때 내가 광복동에 ‘엠쓰리(M3)카메라’라는 카메라샵이 있습니다. 그 집에 내가 자주 다니면서 인화도 하고 이래 했거든. 그래 그 엠쓰리 사장이 문사장이라고 있는데, 문 사장한테 내가 일어난 이 사항을 죽 이야기 하니, 문 사장이 웃더만은, “할 수 없네, 당신이 맡아서 해야지 도리 있나”, 이러더라고. 하하하, 그러면서 자기가 좋은 클럽을 하나 소개해 줄 테니까 그 클럽에 들어가 가지고 당신이 열심히 활동하면은 지금 사진 누가 배워가지고 놓은 사람이 어데 있냐, 이래가지고 그 클럽을 소개 해주더라고요. 그래가 그 클럽이 청사회에요.

(Cheung Jung Hoi)
I got a job at the Busan Bank, in 1968. I worked hard at the bank. Didn’t have any idea to become a photographer. I had a camera, but only for taking group photos. I had no idea. A human resources manager called me before a year passed in the bank. I was given an order to take charge of photos. I had serious thoughts. I couldn’t even sleep well. There was a camera shop called “M3” in Gwangbok-dong, Busan. I visited shop quite often and ordered my prints there. I explained my situation to the shop owner, Mr. Moon. He had a big laugh. “There is no other option for you. You just have to take the job.” He told me that no one had a proper photography education. He would introduce me a good photography club. It was Chungsa-hoi.

그 양반(문사장)도 우리 같은 서클이라. 청사회에 회원이라. 그래가지고 인제 (청사회에)가입을 했더니, 가니까 이제 김석만 씨, 배동준 씨, 김복만 씨, 이준무 씨, 부산에서 쟁쟁한 그 담에 누구야 저 돌아가신 최민식 씨, 부산서 몰개 몰개 하는 인사들이 다 그 청사회에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분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청사회라는게 저게 또 지독한 면이 있습니다. 뭐 어떤 게 있는가 하면은 사진에 대해서는 매월 월례회를 하는데, 사진에 대해서는 매월 자기가 활동한 것 중에 제일 좋은 것 다섯 점을 내야 돼요. 내 가지고 전부 벽면 장식하고 설명을 합니다. 본인이. ‘이건 이래서 좋고, 이건 이래서 찍었는데, 이게 뭐 어떻다.’ 하는 것을 자기가 전부 설명을 해야 돼요. 근데 그래 나오는 작품들 보면 다 좋아요.

(정주하)
그러한 정사회라면 가입하실 때 어떤 조건은 없으셨나요?

(정정회)
조건은 없었어요. 나는 새로 한다고 소개가 됐고 그래가지고 했는데, 요는 들어와서는 다른 사람하고 같이 활동 해가지고 당신도 벽면을 장식하라 이런 얘기에요. 벽면을.

(정주하)
그럼 당시 청사회에는 회원이 총 몇 분 정도 되셨어요?

(정정회)
한 삼십 명 됐을 겁니다. 돌아가신 김석만 선생님, 그담에 정영모 선생, 그건 정인성씨 아들이에요. 그담에 최민식 씨, 김복만 씨, 뭐 그런 정도 기억이 나네요.

(정주하)
그러면 이 청사회에서도 청사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떤 것들이었나요?

(정정회)
그 써클의 목표는 달리 써클 목표를 정해놓고 한 것은 아닙니다. 제일 뭐가 문제였냐면 그때 한국에서 가장 큰 콘테스트가 《국전(대한민국 미술전람회)》입니다. 국전. 그 다음에 사진 쪽으로는 《동아(사진)콘테스트》. 그게 제일 컸습니다. 근데 청사회 회원은 무조건 그 두 개 상을 타든지 해야 한다, 해가지고 그게 하나의 목적 비슷하게 됐죠. 국전은 다소 이 사진 패턴(pattern)이 좀 다양합니다. 다양하고, 그 사진 엑센트가 조금 다른 것하고 조금 특이한 것을 많이 하고 동아(사진)콘테스트는 아주 리얼리즘한 사진 아니면 때 들어가질 못했어요.

Mr. Moon was in the same circle with me. He was also a member of the club. The leading figures of the scene in Busan was all there in the club. Sungman Kim, Dongjoon Bae, Bokman Kim, Joonmo Lee, and Minsik Choi were there. They helped me a lot. And the members were really serious about photography. Every month, member should submit five best photos and explain them to other members. The details of the photos and the logic had to be explained clearly. The photos were all excellent.

(Jung juha)
Then, wasn’t there any condition to join the club?

(Cheung Jung Hoi)
There was no condition to be part of it. I was introduced as a new person. But the point is, you have to do work. You have to hang your photos on the wall.

(Jung juha)
How many members were in the club?

(Cheung Jung Hoi)
The number was about thirty, including the late Kim Suk-man and Jung Young-mo, the son of Jung In-sung. Minsik Choi and Bokmak Kim were also there.

(Jung juha)
Did the club have a stated goal?

(Cheung Jung Hoi)
There was no specific goal of the club. The issue was, the National Art Competition was the biggest art contest. In Photography, Donga Photo Contest was the biggest event. It became a goal that the members of the club must win prized in those two contests. The National Art Competition had diversity in accepting the submitted photos. Novelty and uniqueness were appreciated. Donga Photo Contest strongly preferred realism photography.

생활주의 리얼리즘, 하하하. 생활주의 리얼리즘이 만연을 할 땝니다. 그때, 그 계통의 사진을 많이 했고, 《동아(사진)콘테스트》 가는 사진은 벌써 이미 사진 자체가 다른 데 나가는, 콘테스트 나가는 사진하고 틀립니다. 나는 다행히 시장을 내 주로 많이 촬영을 했으니까, 〈새벽시장〉 가지고 인제 준 특선을 했어요. 사진협회에 가입을 하고 난 뒤에 조금 시간이, 아마 한 이삼 년 흘렀는가, 최민식 선생이 한 번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은 우리 부산에서 사진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 몇몇 사람한테 일본에서 이와미야 다까와(다케지) 선생이 며칠 있으면 부산 자기 집으로 오게 돼 있다는 거예요. 그래 그 선생의 이야기가 뭐냐 하면은 부산 가게 되면은 부산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 사진을 좀 봤으면 좋겠다고 그래 연락이 왔다고.

(정주하)
그게 몇 년돈가요? 그 말씀이 대략 70년도 초반?

(정정회)
예. 70년도 초반 정도 됐을 거여요. 그래 그리 이야기를 하더라구. 그래서 그(거기에) 온 [사람들이] 주로 청사회 회원이죠, 그 사람은 그때 일본서도 다섯 손가락에 들어가는 작가거든요. 이와미야 다까오(다케지)가. 지한파입니다. 한국에 불상, 한국의 사찰, 일본서 그 사람 와가지고 제자 데리고 와서 다 찍고 갔어요.

Realism in everyday life was prevalent in the scene. Photos for Donga Photo Contest looked different from other photos. I was lucky enough to take photos of the traditional market in the early morning. I won a second place in the special selection. Two or three years I joined the Photographers’ Association, Minsik Choi told this to some young photographers in Busan. Takeji Iwamiya would visit Busan in a few days, and he would stay at Mr. Choi’s house. Iwamiya would love to see photos of young photographers in Busan.

(Jung juha)
When was it? Was it in the early 1970s?

(Cheung Jung Hoi)
Yes, around that time. Those whom he met, we were mainly the members of the club. Iwamiya was one of the top five photographers in Japan at the time. He liked Korea. He photographed the Buddhist temples and statues. He even brought his pupils to Korea to take photos.

그래 자기가 한국 와가꼬 젊은 분들을 보자 하는 것은 부산에 있는 작가들이 어떤 패턴을, 어떤 사진들을 가지고 있는가 그걸 좀 자기가 함 보고 갔으면 참고가 되겠다 싶어서 불렀다는 거예요. 우리는 고맙지. 뭐 좋은 얘길 해주면 얼마나 더 좋습니까. 그래가지고 각자 가지고 온 작품을 (보여)줬는데 내 작품을 먼저 (보여) 줬어요.

이 선생님이 하나하나 다 보는 거예요. 80장을, 다 보고 (작품 정리하는 손짓을 하며) 작품 모아가지고 옆에 세워 나오면서 “정 선생, 내가 얘기 좀 해야 되겠다” 카는 거라. 빵구를 그린 거야 빵구. 빵구를 그리면서 이 벽에서 빨리 당신은 탈출해야 한다는 거야. 탈출해라 이거야. 내가 가져온 칠십 장, 팔십 장은 요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기 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들. 요 탈출하라는 것은 특별한 모티브(motive)를, 모티브, 특별한 모티브를 가지고 [벽에서] 탈출하라 이런 얘기여요. 내한테 하는 얘기가.

“선생님은 빨리 튀어 나와 가지고 모티브를 가지세요”하는 얘기에요. 내가 참 그때 잘 갔죠. 그때 그렇게 좋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큰 다행이죠, 내로서는. 그래 다께시(다케지) 선생을 만나고 집에 와 가지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역시 난 사람을, 인적인 면에 뭔가를 주안점을 둬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바다의 사람>도 이건 사람 없으면 바다가 안 되거든요. 그담에 장날, 장날 사람 없이 됩니까? 절대 안 됩니다. 사람 들어가야 되고. 뭐 농촌 해도 농촌에 일하는 사람, 뭐 이렇게를 포인트(point)로 해서 촬영을 하면 될 것 같고. 그래 가지고 찾아다니는 것이 그런 포인트에서 [사진의 모티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제일 장날을 깊이 있게 파고들었죠, 깊이 있게. 그래가 내가 가야 할 그 포지션(position), 포지션을 그때 정했습니다.

He said that he wanted to see the pattern in the works of those in Busan. We appreciated it. We would hear valuable comments. We all brought our works. I was the first one to show my work. He checked each of the 80 photos I brought to him. After the session, he told me that he needed to talk with me.

He drew a hole on a paper. Then he said, “You should escape from this wall, immediately” He told me to escape. The 70 or 80 something photos I brought were all within that very hole. To escape was to have unique motifs. He told me that I should escape in no time.

I’m grateful that I went there. I was lucky to hear such a good comment. After I came back to home, I thought about my work. I concluded that I should focus on people. The sea is nothing without people. The traditional market is nothing without people. Rural areas… I could focus on those who work there. After that, I tried to observe people. The market day was the theme I investigated most. At that time, I set up my position as a photographer.

내가 보니까 가장 인간을 많이 접할 수 있는 부분은(곳은) 장날이여요. 장날. 그때만 해도 전국적으로 장날이 각 지역에 많이 성행을 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지고 그런 상황인데. 그래서 그때 장날을 선정을 했고, 그다음에 농촌과 어촌은 우리가 이게 우리 민족이 살아온 길 아닙니까? 그렇죠.

(정주하)
바탕이기도 하죠.

(정정회)
살아온 길이기 때문에 이거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그것을 매개를 해 주는 것은 장날이다. 이 동네, 저 동네, 도시와 시골, 이 매개를 해주는 것이 장날이다. 그래서 장날을 선택을 했는데, 제가 그 선택을 해가지고 찍은 게 장날만 찍은 게 아닙니다. 농촌도 찍고 어촌도 찍고 장날도 찍고, 장날이 주된 그걸(모티브로) 해서 많이 찍었죠.

그때 지금 모양으로 차가 없었습니다. 모두 차가 없고, 전부 대중교통편이나 안 그라면 버스 편이나 열차 편 이용해야 되고 그렇게 했는데, 그때 생각한 것이 전라도 쪽에,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도 쪽에 장날이 굉장히 집중적으로, 그 뭐라고 할까, 모이는 내용이 집중적으로 많이 일어나고 그래서 그때 전라도 쪽을 자주 갔어요. 지금 이야기하자면 뭐 곡성이라든지, 아까 내가 이야기하던 담양이라든지 그 일대를 많이 갔고요. 그담에 여쪽에, 경상도 쪽은 경북, 경상북도, 청도라든지 경상북도 쪽에를 많이 갔고, 어느 지역에 어떤 특색이 있는 장날이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제가 장날의 어떤 이벤트(event)를, 그냥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이벤트보다는 장날의 어떤 아침의 분위기라든지, 그러니까 장이 서는 날 아침의, 물건을 팔기 위해서 모여드는 사람들의 분위기, 다시 말하면은 경북을 가면 소시장이 아주 유명하니까 거기는 온 동네 [사람들이] 소 몰고 나옵니다. 팔기 위해서. 그런 분위기 또 가령 곡물시장에 가면은 곡물을 팔기 위해서 지고이고 오는 것이 거의 곡물이예요. 집결되는 것도 곡물이고, 팔리고 나가는 것도 다 곡물이지요.

인근에 있는, 주변에 있는 부락민들 또는 인구들이 많이 와가지고 필요한 물건을 사가더라구요. 특별하게 어떤 지역에 어떤 특수한 분야를 내가 촬영을 한 것은 아니고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그 특성을 그대로 촬영을 하면서 살리는 방향으로 그렇게를 많이 했죠.

The market day was an occasion where one could see a biggest number of people. Different from now, there were so many market days throughout the country. The market day functioned as an intermediary between regions. That’s why I selected it as a theme. But that was not the only theme. It was a main theme. I did rural areas and fishing villages, too.

We didn’t have many cars then. One had to use public transportation. Then I thought about the Gwangju area where many market days were concentrated. So I went to that region quite often. Goksung, Damyang, and surrounding areas. I also went a lot to North Gyeongsang Province. Such as Chungdo. Each region had a specific market day. So, I did not focus on the actions of buying and selling. Rather, I focused on the atmosphere of the market day. Which means the specific mood of a market. For example, in the North Gyeongsang Province, everyone brings a cow, since the region is known for cows. That was the atmosphere. The atmosphere was also different in another region known for crops. People gathered crops, people sold them away. Villagers and workers came to market days and bought what they needed. It was not to present specific local products but to convey the unique atmosphere of places.

(정정회)
이 사진이 장날 아침에 소를 몰고 장터를 가는 소녀, 이 소녀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예, 이분입니다.

(정주하)
네, 네.

(정정회)
이 분인데, 이분이 그 자기는, 여기 청송에서, 몇 년도 청송에서 촬영한 거 표시가 다 되어 있거든요, 이분의 이야기가 그때 약 스무 살 가까이가 되었답니다, 스무 살 가까이가 됐는데, 이 소 팔아가지고 자기 시집가는 밑천을 전부 마련하고, 이 소 팔아가지고 자기 시집갔다는 거예요.

지금은 자기 남편도 학교 교편 잡고 있고 아들, 딸들도 다 교편 잡고 있어요. 예. 그런 집안도 아주 훌륭하더라고예, 그 얘기를 들어 보니까. 그래가지고 내가 너무 기뻐서, 내가 이 가지고 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이 작품 전지작업을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게 어디 출품했다가 내가 가지고 있는데, 작품을 할 수 없이 내가 사인을 해가지고 이 사람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이걸 기념으로 이래 가졌으면 좋겠다’ [하고 주었지요], 그래 차 한 잔 먹고 헤어졌죠. 하하하.

This is a photo of a girl, leading a cow on the market day. This girl is the very woman in a photo that I took later. I wrote the location of the shooting in the back of the photo. The woman told me she was about 20 years old then. Her family sold the cow to get the money for her wedding.

Her husband and children are all teachers now. She now has a good family. I was so pleased to hear the story. This is the work that I like most. I had a big print of this image for some competition. signed the piece and gave it to the woman. I told her to keep the work as a present. We had tea and said goodbye to each other.

(정주하)
하하하, 아 이거 특별한 인연인데요.

(정정회)
그래가지고 이게 또 방송국에 또 소문이 들어가지고 방송국에서 또 특별 촬영하러 나왔어요. 특별 촬영해가지고 그것도 방송이 되고 그랬습니다.

(정주하)
네, 훈훈합니다.

(정정회)
하하하, 아니 그래 참 좋은 일이예요.

(정주하)
사진의 본질이기도 하지요.

(정정회)
예, 맞습니다.

(Jung juha)
It was a special connection.

(Cheung Jung Hoi)
Yes, it was. And a TV station covered the story. It went on air.

(Jung juha)
Such a heartwarming story.

(Cheung Jung Hoi)
It’s a beautiful story.

(Jung juha)
It touches the essence of photography.

(Cheung Jung Hoi)
You’re right.

《축제의 사람들》은 저게 2002년도 부산에 아시안 게임을 했습니다. 부산이. 아시안 게임을 주최로 했습니다. 아시안 게임을 주최로 하다 보니까 이게 뭔가 부산을 조금 픽업(pickup)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가져야 되겠다 해가지고 생각한 게 《축제의 사람들》입니다.

《축제의 사람들》을, 저걸 작업하기 전에 상당히 오랫동안 그 아까 얘기했다시피 축제의 사람들도 찍고, 장날도 찍고 뭐 다양하게 활동을 했는데, 축제의 사람들은 내가 보니까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예술의 맥》과 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인 근원은 저기에서 다 나와, 축제에서 다 나온 거여요. 저기서도 사람들의 생활하는 모습 또는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과정 또는 여러 가지 뭐랄까 저, 공연적인 거, 이런 거 전부 축제의 사람들에서 많이 나와지더라구요. 그래서 《축제의 사람들》을 한국에 있는 모든 축제를 어울러가지고 이제 [사진의 모티브로] 잡았는데, 그걸 또 하다 보니까 그와 연관 되는 게 파생되는 게 굉장히 많더라구요. 부산의 축제도 축제고, 저거는 한국의 축제고, 부산의 축제도 있고. 또 그렇게 하다 보니까 《종묘제례》 이것도 부산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장면을. 볼 수 없는데, 보니까 이것도 아주 중요한 장면이예요. 그래서 요것도 손대게 되고, 《풍어제》도 그렇게 해 가지고 연결돼지고, 이렇게 해가지고 이제 시작이 되진 겁니다. 2000년도부터 시작이 그렇게 되진 거지요.

“People of the Festival” is about the Asian Games held in Busan in 2002. I created the work because wanted to highlight the city.

Before I created “People of the Festival,” I made photos of diverse people. I think the artistic foundation of Korea all comes from festivals. In the work, one can see various aspects of people, their lives, process, or different performative elements. So, “People of the Festival” tried to deal with all the festivals in the country. And then I realized there were so many connected themes. A festival in Busan is a festival. My work about the festivals throughout the country. The royal ancestral ritual, it is never seen in Busan. I realized that it was also an important festival, in a sense. That’s how I started working on that event, too. I also started recording the Ritual for Fishermen, since 2000.

(정정회)
김금화 선생이, 서해안에서는 이 사람을 따라갈 사람이 없어요. 이 사람을 따라갈 사람이 없어요. 《서해안 풍어제》[하는 사람] 누가 있는가는 모르겠는데.

(정주하)
그러니까 선생님은《풍어제》만 포커스(focus)를 맞춰서 들어가신 것이군요.

(정정회)
그렇습니다.

(정정회)
아니,《서해안 풍어제》는 김금화가 없으면 안 됩니다.

(정주하)
그렇죠. 그렇죠.

(정정회)
안됩니다. 그래서.

(Cheung Jung Hoi)
I had to follow the shaman Kim Geum Hwa for the Ritual for Fishermen in the West Sea.

(Jung juha)
So you only focused on that ritual.

(Cheung Jung Hoi)
That’s correct. Without her, the rituals in the West Sea are just not possible.

역시 제가 얘기하고 싶은 거는 사진은 리얼한 사진. 특히 인간관계의 리얼리즘, 리얼한 사진, 그래서 제가 소재를 다루는 것은 장날이라든지, 또 들녘이라든지, 바다의 사람이라든지 거의 다 사람을 관계로 한 사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제 문자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그 바다의 사람들이라든지, 들녘도 농촌의 사람들, 장날도 장날의 사람들. 사람들을 통해서 내 사진을 표현을 하고, 그 사람들의 때 묻지 않은 표정, 그게 조로서는 제일 좋아 보이죠. 제가 일본 이와미야 다케지 선생 얘기를 딱 듣고 생각해 낸 것이, 역시 ‘뭔가 특징이 있는 뭔가 결정적인 걸 하나 만들어야 되겠다.’ 고 생각한 게 사람입니다. 사람을 찍어야 되겠다. 그러니까 바다사람이라든지 장날이라든지 이게 전부 사람이 안들어가면 행사가 안되지는 일들이니까. 사람을 접근을 해야 되겠다는 것을 그때 많이 느꼈죠. 그래가지고 그렇게 접근을 했습니다. 그래 지금 만들어진 작품도 그렇고요.

What I want to say is that photography should be realistic. It especially depicts the realism in the human relations. So, I focus on the market day, labor in the field, or workers in the sea. Almost all of them are about human relations. When I make the title of my work, I like to put the word ‘people’ in it. People of the sea, people of the countryside, in the field, or people in the market… I express people through my photography. I admire the purity that those people have. When Takeji Iwamiya gave me advice, it was ‘people’ that I thought of as my point. I thought I should capture the image of people. All those events are not realized without people. I thought about this theme a lot. My works show such thoughts.

(정정회)
최근에 만들어진 『예술의 맥』, 『예술의 맥』. 부산이 지방이지만, 부산이 가지고 있는 무형문화재, 부산시가 가지고 있는 무형문화재가 열여덟 가지가 됩니다. 예, 열여덟 가진데, 그중에서 여섯 개는 문화관광부에서 지정한 문화재고,

(정주하)
국가 문화재.

(정정회)
예. 나머지는 부산지역에서 선정된 문화재입니다. 문화잰데, 이 문화재에 대한 작업이 부분적으로는 작품들이 난무를 해요. 뭐 전시를 한다든지 공모를 해보면 난무를 하는데, 부분적으로 책이 이렇게 맨들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것이 무형문화재 작품입니다. 이 책 안에 열여덟 가지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무형문화재, 다시 말하면 인간문화재도 그 안에 들어가 있고요.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영어를 자문을 다 달았어요. 한글에다.

(정주하)
아, 영역본.

(정정회)
예, 영역본. 영역본이죠, 일종의. 영역본. 다 달아가지고, 이거를 외국인들이나 한국에 있는 일반인들에게 이걸 돌려줌으로 해서, ‘부산이 가지고 있는 무형문화재에 대해서 확실히 뭔가를 좀 심어야 되겠다’, 그런 뜻에서 이(이것을) 만들었어요.

My recent work, “The Vein of Art,” is about intangible cultural assets in Busan. The city has 18 intangible cultural assets. Six of them are registered by the ministry. The rest are registered by the regional government. There are already too many works about cultural assets. However, there was no book that focused on a specific asset. That’s why I created a photo book about them, which contains all of the 18 cultural assets. It has all of the intangible cultural assets. The book also has translated texts in English. It is intended to make a clear impression about the intangible cultural assets in Busan by providing the knowledge to foreigners and the people in Korea.

제가 제일 바람직하는 것은 『예술의 맥』1집이 아니고, 『예술의 맥』 2집이 나오는 게 제일 바람직한데, 제가 볼 때는 능력이 좀 어렵지 않겠느냐, 나이라든지 여러 가지 여건이 어렵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다음에 『예술의 맥』은 보면은 전부 무형문화재입니다. 무형문화재인데 부산의 무형문화재가 큰 것이 부산무형문화재, 그담에 수영무형문화재, 그담에 구덕무형문화재.

(정주하)
네.

(정정회)
큰 덩어리가 세 개가 있어요. 제 2의 작업이라는 건, 그건 내가 지어낸 말이고, 작업을 하면서 마무리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참여가 안돼졌습니다. 예.

What I really want is to create another edition of “The Vein of Art.” I think it might be difficult to realize due to my age and other circumstances. Then, there are three bodies of intangible cultural assets in Busan. Those of Busan, Suyoung, and Gudeok. These make three big categories. I just made up the words about another edition of the project. I am thinking about completing my works, which I have to work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