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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 아시아의 사진 : 강봉규 구술사 - 57STUDIO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 아시아의 사진 : 강봉규 구술사
2014
Client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Project ✍️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 아시아의 사진 : 강봉규 구술사

사진 | 강봉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아시아의 사진 : 강봉규 구술사
2014

Asian Culture Center
Archive & Research
Photography in ASIA : Oral History Kang Bong-gyu
2014

작업 소개

이 컬렉션은 ‘아시아의 사진’ 아카이빙 프로젝트의 한국에 관한 자료 컬렉션 중 하나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의 원로 사진가들의 생애사에 대한 구술을 기록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한국 사진사의 부족한 서술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사진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서울 지역 주류 사진계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정리되고 있는 반면, 사진계에 충분한 자료를 남기지 못했거나, 서울 이외의 지역 사진가들은 상대적으로 여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예술사진 영역이 아닌, 실용적 영역에서 활동했거나, 지역에서 활동한 사진작가들을 적극적으로 포괄하였다.

정정회 구술사
Oral history Cheung Jung Hoi

강봉규 구술사
Oral history Kang Bong-gyu

김한용 구술사
Oral history Kim Han yong

임정의 구술사
Oral history Lim Chung-eui

크레딧 보기

크레딧:

구술자: 강봉규
아시아의 사진_구술채록 책임연구원: 정주하
아시아의 사진_구술채록 연구원: 유지의, 현지연
정보원 예술감독: 김선정
진행: 정주영, 노해나
영상 및 음성기록: 스튜디오 것(윤유성)
영상구성 및 편집: 57스튜디오(이미지)
번역: 박재용
자료협조: 강봉규, 김진희, 광주비엔날레, 광주시청, 국회도서관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주관: 아시아문화개발원 정보원사업팀

‘아시아의 사진’은 사진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근현대사를 조망하는 컬렉션으로 아시아 사회, 정치 및 문화를 기록한 4명의 사진들과 사진가들의 구술 채록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은 아시아가 근현대를 거쳐 오면서 사회와 문화를 기록해 온,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수십 년 전의 도시 공간, 건물, 공장, 광고사진, 보도사진은 이제 사실성을 전달하는 임무에서 벗어나 당시 문화와 역사를 기록한 시대상의 보고로 인식되고 있다. 수집된 컬렉션은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근대의 격변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또한 원로 사진가들의 생애사 구술 채록 영상은 생생한 증언을 통해 사진 기록의 서사적 공백을 보완해 줄 것이다. 향후 대만,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전역으로 수집 범위를 확장하여 아시아 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출처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 문화예술 전문 주제 아카이브 전시’’ 中 ‘아시아의 사진’ 전시 소개글

강봉규 : 1959년돕니다.

정주하 : 1959년.

강봉규 : 네. 『호남신문』에 입사하면서 이경모 선생을 뵙게 됐죠. 그때 그 여수 반란, 제주도 5.3 (정: 4.3.) 사건, 다아 참여했던 사람이고, 6.25, 그 처참한 현장을 전부 기록으로 냄겼던 분 아닙니까. 이경모 선생은 역시나 보도사진으로서의 대단한 자질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분한테 사진을 배우면서. 내가 왜 사진을 배웠느냐면, 어렸을 때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게 아니고, 관심이나 인연이 있는 거 아니고, 카메라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었어요.

It was 1959 when I first met Kyungmo Lee. I met him as I started working for the Honam Shinmun (newspaper). He covered the Yeosoon Rebellion, Jeju Uprising, and the Korean War. He made records of all the atrocities. Mr. Lee had a great talent in journalism photography. I had an interest in the camera while being taught by Mr. Lee.

4.19가 발생하게 된 것은 3·15부정선거 때문에 그렇게 됐잖아요.그 이승만 박사가 인제 물러나면서, 그 4.19가 나왔는데. 그……거의 비슷하게 이렇게 가다가, 4.19라는 그 사건이 발생하니까. 김주열, 갸가 인제 시체로 발견 방송에서 나온 후로 불이 붙어가지고 인제 사건이 터졌는데, 저는 엄청난 의협심으로 학생 편에서 대치를 했습니다. 아무튼 그 경찰봉들이 제지 과정에서, 후드려 패불고, 고문하고, 곤봉으로 후드려 패니까,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앞장선 거예요.

정주하: 아 그 신문 기자 (강: 기자가.) 신분으로서요. (강: 신분으로.)

강봉규: 렌즈도 광각렌즈 가지고 바로 앞에서 후드려 얼굴까지 다 내게(나오게) 해가지고 찍습니다. 그리고 인제 거 인제 신문사 앞에 전일빌딩 바로 앞에가 와이엠씨에이 건물이 있었어요. 작은 건물이. 그 전시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전시를 해뿐 겁니다.

정주하: 아 어떤 사진을 전시하신 겁니까.

강봉규: 경찰봉으로 후드려 팬 거.

정주하: 아 4.19시기에! 경찰이 진압하는 광경들을,

강봉규: 다 찍어가지고 일일이, 몇 사람이 갔어요. 경찰관이 다 나온……,

정주하: 그게 선생님의 전시 때문에,

강봉규: 전시 때문에.

정주하: 그러면 이쪽 그 광주에서는 4.19에 대한 공권력의 시선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었네요?

강봉규: 아니요, 굉장했지요. 그래가지고 계엄령이 선포가 되니까, 나는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나가버리니까, 우리 사장이 내 팔을 탁 휘어잡고, 카메라 들고 나가니까, 못 나가게 하는 거요. 총 맞아 죽는다 그거예요. 실제로 인제 그 도청이 이렇게 있습니다. 도청이 그러면 이쪽에 광주호텔이라고 있어요. 그래가 지금 관광호텔이 있지? 와이엠씨에이 바로 건너편에. 거기에가 광주호텔이란 곳이, 광주여관이 있었는데 높이가 여기 여기보다 높아요. 학생이 팍팍 쓰러져 버린 거요. 총으로 쏴 버리니까. 나도 맞기 싫, 겁이 나니까, 카메라 들고 그걸 뛰어 올라간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어요.

The April 19 Revolution happened because of the election fraud on March 15. The president Syngman Rhee resigned after the revolution.. It was sparked after the news covered that Ju-yeol Kim was found dead. I was on the side of the students with a sense of righteousness. I was at the front of the demonstration because the police was so violent to the students.
Jungjuha : You did so as a journalist?
KangBong-gyu : Yes, as a journalist. I took photos with a wide angle lens and captured the faces of police troops. And there was the YMCA building in front of the newspaper’s headquarters. There was a small exhibition space in the building and I exhibited my photos there.

Jung juha : What kind of photos did you exhibit?
Kang Bong-gyu : Photos of the police violence. When the martial law was announced, the owner of the newspaper tried to keep me in the office. He held me in the arm because I always went out with my camera. He told me that I would be shot. I saw students being shot and falling down. I ran up to a building. I took photos from there. I didn’t miss anything. That’s how I recorded the revolution only with a sense of just. It happened in the midst of bullets.

정주하: 그 광주여관, 당시에 여관.

강봉규: 광주여관 담장을, 그 높은 담장을,

정주하: 그 도망치신 거군요.

강봉규: 도망가면서, 올라가서, 위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놓치지 않고. 그렇게 해서 4.19를, 사실은 그…하나 의협심 가지고, 그…총탄 속에도 뚫고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그랬어요.

정주하: 네. 그러면 그때 전시하셨던 거는 4.19가 지나가고 나서 그 후에 전시를 하신 건가요.

강봉규: 아니요. 4.19…….

정주하: 그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전시를 하신건가요?

강봉규: 4.19데모 중에. 왜 그러냐면, 데모가, 나오지요. 가령 공고, 광주에서 가장 세, 심하게 데모를 했던 학교가 부고, 공고, 그담에 광고, 이렇게 됐는데, 이 데모가 시작할라면 반드시 『전남일보』 사진부장한테 전화가 와요.

정주하: 아, 어느 측에서 온 거죠?

강봉규: 학생들 측에서.

정주하: 아. 학생 측에서요?

강봉규: 제가 나가면 사진 찍으라고요.

정주하: 스크럼 짜구.

강봉규: 스크럼 짜구 이렇게 타준 거요, 사진 찍으라고 높이,

정주하: 오 아 선생님을,

강봉규: 올라 태워.

정주하: 아 무등을 태워갖고 선생님을 높이서 찍으라고,

강봉규: 어 무등을 태워 그렇게

Jung juha : Did the exhibition happen after the revolution?

Kang Bong-gyu : No, it was during the revolution. Well, there were three strong high schools that led the demonstrations in Gwangju. Before they start, they always called the head of the photo department of Jeonnam Ilbo (newspaper).

Jung juha : Who made those phone calls?

Kang Bong-gyu : The students did. They raised me up like this when I went to the demonstrations.

Jung juha : Did they put you up on their shoulders?

Kang Bong-gyu : Yes, they did.

정주하: 그렇게 도와줬었군요, 호의적으로. 오와 그러면 사이가 굉장히 좋으셨던…….

강봉규: 좋지, 내가 지들 방어시켜주니까 그라고 내가 들어가면 경찰이 함부로 곤봉을 치지 못하니까, 그걸 또 공개해 버리니까 신문에 또 나오죠, 몇 놈이 여기 갔다고. 폭동, 폭학,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과…….

정주하: 과잉진압이죠.

강봉규: 과열진압이지. 이제 그렇게까지 하니까 의협심, 영웅심이 드는 거야. 목숨 걸고. 근데 안 죽었어잉, 그래서 이번에도 안 죽었나? 허허허.

정주하: 아니 근데 그렇게 하셨을 때, 신문사의 입장은 어땠었을까요?

강봉규: 신문사는 좋지요.

정주하: 아 그렇습니까.

강봉규: 엄청나게 좋지요
.
정주하: 그 당시에 신문사는 굉장히 이렇게,

강봉규: 그러니까 오르지, 신문이. 매일 그 부수가 오르고 전남매일은 못 따라와요. 『전남일보』를.

정주하: 보통은 신문사들이 최근의 얘깁니다마는 언론사들이 정부 편에 서서 보도를 하거나 그런 그 편집을 하는 방향이 있어서 인제 마찰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 『전남일보』는 그러면 좀,

강봉규: 제작방향이 거의 야, 야 쪽이죠.

보도……인제 사진의 중요한 기능이 기록성 아닙니까. 기록성 중에 예술성을 결합시킨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해요. 신문사진이란 것은 그 잔인하고 혐오감 있고 또 험악한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거 아니거든, 그 유일하게 한국뿐이야. 데스크들이 잘못한 거야.

이 독자들은 그……가령 예를 들자면, 동경의 쓰나미 사건, 아니 쓰나미 사건 전에 깨스중독 사건, 그 험악한 거 안 보여 주잖아요. 깨스가 다 없어지고 고양이가 지나가는 거 사진 하나 딱 찍어갖고 내는 것이 일본사람 태도 아닌가. 전쟁터처럼 사람 죽을라고 해도 흥분 안 시키고, 사람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혐오감 있고 막 그런 것 하나도 안 보내잖아요. ‘잔인한 사진 같은 거 내선 안 된다.’가 나는 강력, 강하게, ‘기자도 하나의 예술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미학적으로 처리를 해라. 너무 혐오감 있고 잔인한 것은 안 좋다.’ 나는 그런 주의자였어요.

Jung juha : So, you had a good relationship with them.

Kang Bong-gyu : Sure I did, since I defended them. With me there, the police couldn’t beat them with clubs, And I publicized them. I felt like I was an important figure of justice.

Jung juha : What was the position of your newspaper company?

Kang Bong-gyu : They pretty much liked it. The Honam Shinmun experienced a boost in sales. Other newspapers could not catch up with Jeonnam Ilbo.

The important function of journalism photography is its ability of recording. It is really important to have artistic value, too. Journalism photography is not just about showing cruel, disgusting, or violent things. Only the Korean newspapers focus on them. It’s a fault of the editorial desk.

For example, we haven’t seen any disgusting photo about the Japanese Tsunami, or the Sarin gas attack happened in Tokyo. The Japanese attitude is to take an image of a cat going across the crime scene after the deadly gas is gone. They do not agitate people even when someone is dying. They don’t publicize any image that raises a sense of disgust. I think that journalism photography is not about showing cruel images. I strongly think that a journalist is also an artist. One should consider the aesthetics.

너무 혐오감 있고 잔인한 것은 안 좋다. 그러니까 설득력이 있어요. 사진이. 그 잔인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우리가 이 풍경사진 하나 찍는 데 있어서도 소재를 분석해가지고 새로운 형상으로 아까 말씀드렸죠, 형상으로 그 독창성 있게 표현시켜 주는 것,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거든. 그래야 그 형상성을 가지고 보는 사람에게 어떤 공감을 주는 거지, 숙연허게. 보도사진도 마찬가지예요. 가령 남원 열차사고 같은 거 있었는데, 막 살려달라고, 곧 죽겄다고 하는 거 다 찍었죠. 하나도 안 썼잖아. 죽은 사람 얼굴만 내놨지. 경쟁을 그런 데서 해야지, 필요 없는 거 내놓아가 버리면 조사적 가치는 있지마는 자료가치, 그걸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너무 잔인, 잔인하다 이거요.

It is not good to have too much distaste and cruelty. That was my philosophy. Then the photos were convincing. They were not about cruel subjects. Even when I took a landscape photo, it was important to analyze subjects and create new forms in a unique way. This is very important. That figurative quality can draw certain empathy from people. The same applies to journalism photography. For example, we had a train accident. People took a lot of photos about people suffering. None of the images were used in the end. Only the faces of the dead were publicized. We have to compete in the good things. There’s no need to produce useless things. It can be valuable as a record, but that would be too cruel for readers.

광주비엔날레를 하나 만들자 하는 것이 원래 서울비엔날레를 서울미술협회에서 비엔날레를 아시아 지역만 한다고 김영, 고인 되신 김영중 선생이 구상을 했어요. 그분이 나한테 찾아와서, 이런 일이 있다. 그래서, “그러면 광주에서 한번 해봅시다.” 그래가지고 내가 비엔날레 뭣인지도 잘 모르죠. 일 년 만에 한 번씩 한다고, 이 년마다 한 번씩 하는 것이지. 그래서 내 시장을 단도직입적으로 만나가지고 “이런 행사를 하고 싶은데 어쩌것냐.” 그랬더니, “아시아 지역만 하자.” 그랬더니, 그 사람 나보다 더 앞서가지고, “할라면 세계적인 것을 합시다.” 이렇게 된 겁니다.

정주하 : 당시에 시장은?

강봉규 : 강운태 시장 아주 열정이 있습니다. 6개월 만에, 계획을 수립해가지고 나하고 협의해서 딱 시작을 하니까, 바로 어떤 현상이 오냐면 “광주 5.18을 희석시키기 위해서 만든, 니들 그런 거 아니냐.” 내가 그랬거든. 먼저 5·18 정신을 세계 속에 심자. 《광주비엔날레》를 하자.

The idea of creating an international biennale, the late Young-joong Kim initiated the idea that Seoul would host a biennale, managed by the art association in Seoul. It would focus on the art of Asia. He told me about this idea, and I suggested him that Gwangju would host the biennale. I didn’t know well about the biennale. Only that it would happen every two years. I went to meet the mayor of Gwangju and suggested him to host it. I told him to host a biennale of Asia. But he was ahead of me, suggesting to host a global biennale.

Jung juha : Who was the mayor then?

Kang Bong-gyu : It was Woon Tae Kang. He was full of passion. He established a plan just in six months, then started working with me. Then, some people suspected us that the biennale was to dilute the spirit of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But I was the first one to say, “Let’s make the May 18 spirit go global.”

그랬더니 ‘희석시킨다.’ 해가지고 반대들이. 대학에서부터서 난리가 난 겁니다. 민중미술 하는 친구들이. 만장을 수만 장을 만들어가지고 5.18공원에다 다 세우고 그 반대, 소위 안티를 했었습니다. 그걸 기어이 물리치고 제가 그것을 만들었어요. 근데 그 상황에서 소위 누구를 초청을 했냐면, 비디오 아트, 백남준 선생을 초청을 했어요. 광주가 생긴 이후로 가장 관객을, 186만 명을, 입장객을 했어요. 전무후뭅니다. 딱 해가지고, 이걸 결과를 보기 위해서 내가 퇴장하는 터에 가서 중학생을 만나가지고 어쩌더냐 그랬더니 중학생이 “아 재밌어요.” 그렇게. “성공했다.” 그 하나가 성공되었다 생각을 한 거여요. 그렇게 해서 그 행사를 했고. 또 예총 회장을 하면서 《빛의 축제》를 처음으로 우리 국내에서 만들었어요. 그래가지고 5.18 단체를 회장단을 싹 모집을 했더니 28개의 단체가 있더구만. 나는 그래가지고 이것을, 이 상처를 씻자. 낭만의 거리로 만들자. 근데 다 찬성을 하는 겁니다. 거리 축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죠. 대학로에서 거리에서 축제 안 했습니다. 거리 축제를, 36개 팀을 전국에서 모여가지고 삼천(3000) 명을, 출연자들을 삼천 명, 참여했습니다. 이 5.18도로를, 금남로를, 온갖 광주 시민에게 그 쓰라린 상처를 입혔고, 그 한을 냄겼으니까, 이걸 낭만의 거리로 만들자.내가 그 계획을 한 거예요.

“Biennale is a way to do it.” But some people just opposed my suggestion. The universities were the first ones to react. …and the Minjung Misul (people’s art) artists. They put up tens of thousands of funeral odes in the May 18 park as a protest. I pushed forward, despite the opposition. Then I invited an artist. It was Nam June Paik, for the first Gwangju Biennale. 1,860 thousand people visited the biennale, which was the biggest number ever in Gwangju. It was unprecedented. I asked a middle school student at the exit of the exhibition to check the reception of the visitors. The student said it was entertaining. Then I thought it was a success. That comment gave me a sense of conviction. I also organized the first Luminarie in Korea while serving the president of the Korean Peoples’ Artists Federation. I gathered the presidents of May 18 organizations, and there were 28 of them. Everyone agreed with my opinion about soothing the wound and making the streets in the city center as a more pleasant place. It was the first time to hold a street festival in the country. Even in Seoul, there was no festival that used the entire street. We invited 36 teams from all over the country. The number of performers was about 3,000. Since the May 18 street in the city center left wounds to the citizens, I wanted to transform it into a street a pleasant place.

《한국인의 고향》이라는 테마 가지고 전시했던 것이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박세직 위원장이 제 것을 채택을 했어요.

이걸 올림픽 때 홍보용으로 쓰면 쓰겠다. 이렇게 됐었어. 근데, 그 당시에 왜 안 되었느냐면, 이 사진, 이런 사진이었습니다. (『한국인의 고향』 사진집을 보여주며) 문화가 얼마나 문제가 있는 거를 말할 수 있는데, 이런 사진. 『고향』에 다 들어갔던 사진인데. 이걸 보고, 어 박세직 위원장이 내 작품집을 구입을 하기로 하고, 한 이만 권 해준다고 그랬을 거야 아마. 그걸 긴급회의가 열렸어요. 청와대, 안기부, 공보부의 문화담당 (정: 그렇겠지요. 네. 네.) 셋이서 회의를 했는데, 이런 어두운 사진들,

지적이 뭐이냐 하면, 어두운 사진이 있어서, 안되겠다. 이건 제3국으로 갔을 때에는 왜곡될 수가 있다. 이렇게 얘기가 돼가지고, 사진 일곱 점을 바꿔 달라 한 거여. 우리의 모습인데, 우리의 삶의 모습인데, (정: 네, 네.) 왜 그게 어둡냐. 가난하다는 것이 죄는 아니다.

그래서 내가 전화를 딱 내부리고 거절했어요.

『한국인의 고향』이, 요행히도 그 책 나온 1판이 그 문광부 추천도서가 됐어요. 대단했습니다.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사(4)판이 됐다니까. 그래서 내가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참 기억이, 감회가 참 새롭습니다. 거의 다 내 작품은 아시다시피, 삶의 모습이죠. (정: 삶의 모습.) 우리 조상들이 살고 있는―그 독특하잖아요―그 선조들의, 그 우리 조상들이 그 겸손하고 부지런하고 또 탐구적이고 열심히 사는 이런 모습들이 다 나와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다 감성적이고. 그리고 이……무슨 일을 하나 딱 던져놔도 그, 이 이벤트가 예술적이죠. (정: 예.) 고향 사람들, 시골 사람들이 다 그럽니다. 저는 그걸 예술로 보지. 대나케나(아무렇게나) 보는 거 아녀요. 개집을 하나 딱 만들어 놓으면 설치미술로 보지 그냥 그 개집으로 안 보지요. 닭집도 마찬가지고. 어머니들이 도, 도구통 있죠, 도구질하는 거. 떡방아 찧는 거.

이 감각적으로, 예술적인 어떤 미, 미학적으로 숙련된 사람들로 이렇게 보이죠. 저는 항상 우리 고향이, 를 볼 때, 관찰, 사진은 그 관찰 속에 그 어떤 소재를 발견한 거 아니에요. 그 소재 속에 자기 것으로 또 다시 재구성해서 새로운 형상을, 형상성으로 구상을 구축을 하는 것이 사진인데.

저는 사진을 적당하니 그냥 그 대나깨나 찍은 사실이 없습니다. 반드시 구상하고 나갑니다.

The organizing committee of the Seoul Olympics hasselected my work. The selection was done by Sejik Park, the chair of the committee. It was about the theme of Korean people’s hometown. It was to be used as a PR image for the Olympics. However, my work was not selected at the end. We can talk about the problems of the culture here in this country. These are the photos about people’s hometown. The chair of the committee decided to buy my photography book about this theme. An emergency meeting took place with the Blue House, the military intelligence, and the public relations department. It was pointed out that there were ‘dark’images. They concluded that those images would distort Korea’s image. And asked me to change seven photos in my book. I asked, “Why do you think these images are gloomy? “This is how people live their lives. To be poor is not a sin. So I declined the offer.

Luckily enough, “The Home of Korean People” was listed as the recommended book by the cultural ministry. This photo thus reminds me of fresh memories. As you know, my work is mostly about people’s lives. Our ancestors’ modesty, diligence, curiosity, and earnestness are carried by all of us. We are very emotional. We are artistic in doing events. I regard them as artistic. I don’t disregard them. Even a dog house is an installation art. The same applies to a henhouse. Even our mothers and the tools for making rice cakes, I see certain aesthetic beauty and mastery in there. I always try to observe the home of people. Photography is a discovery of subjects from observation. . Photography is about constructing the new figure by reorganizing the subjects through one’s own mind. I never took any photo without much consideration.I alway think beforehand.

작품집은 실패한 것입니다. 실패 해버렸어요. 왜 그랬나면 한국인의 얼굴에 대한 두개골 형을 사실은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한국 사람의 지역적으로 두개골 연구를 했어야 되는데, 그거를 못하고 그냥 느낌으로만 지역에 있는 터줏대감만 찾아다녔더니 결국은 한계가 와버린 겁니다. 제가 그 조용선이라는 한국인 얼굴 연구하는 학자 있잖아요, 그분허고 아마 이야기를 했더니, 상당히 접근을 했다고 그래요, 한국인의 얼굴하고. 느낌으로만 강원도 사람은 어떻게 생겼다. 전라도 사람, 충청도 분, 또 서울 사람은 여러 군데로 있으니까 서울의 왕족들, 터줏대감보다는 왕족을 중심으로 해서 한번 찾아가 봤고, 그래서 이렇게 쭉 했더니, 어느 정도 접근을 했으나, “좀 아쉬운 데가 있다.” “아 맞다, 그렇다.”고 내 그랬습니다. 한계가 와서 그만뒀습니다.

사진을 하는 데는 소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어야 연구가 되고, 관찰하면서 연구가 되죠. 1집에서는 그렇게 나오는 데, 2집, 3집에서는 하다보니까 섹션별로 노나야 되겠다. 민속학은 민속, 세시, 세시풍속은 세시풍속, 생활 환경은 환경, 주택이면 주택, 이렇게 인물이면 인물, 이렇게 섹션으로 구분을 했죠. 저는 사진의 중요한 기능의 한 기능은 기록이라는 것을 제일 앞세우죠. 기록성을 중심으로 해서 예술성을 결합시킨다. 이게 내 사진의 철학입니다.

사실은 그동안에 쭉 제 생각을 밝혔으니까 다시 정리를 하기가 그렇습니다마는, 살아있는 사진, 또……니가 찍으나 누가 찍으나 똑같은 사진, 그런 사진을 해선 안 된다고,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사진. 꼭 그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이 이야기 하드끼(하둣이) 철학이 있는 사진을 만들어라. (정: 네.) 그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요.

My photography book was a failure. I had to have enough knowledge about the shape of the head of Koreans. I had to do a research about the regional difference. There was a limitation in visiting old people merely depending on my impression. I talked with Yong-sun Cho, an academic who studies the face of Koreans. I told him that I worked upon my impression that certain faces are from certain regions. For example, I met different from different provinces. There are so many people in Seoul, so I decided to meet the royal family. It worked to some extent, but it wasn’t that satisfactory. I recognized the limitation and suspended the project. One has to have enough knowledge to work on a certain subject. Observation is a way to research. I put the capacity of recording as the primary function of photography. The artistic value is added upon the capacity of recording. Create photography that is alive. Create photography that only you can create. As Henri Cartier-Bresson has told, create photography with philosophy. That’s all I want to s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