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MMCA
✍️ 열린강좌 미술관소장품강좌 (권진규, 신학철, 이쾌대)
2020
Client 국립현대미술관 MMCA
Project ✍️ 열린강좌 미술관소장품강좌 (권진규, 신학철, 이쾌대)

국립현대미술관
열린강좌
미술관소장품강좌
2020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Open Class
MMCA Collection
2020

작업 소개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이 들려주는 소장품 10분 강좌로, 작가 12명의 작품을 매주 수요일 Youtube LIVE 를 통해 공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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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

제작: 국립현대미술관
기획: 강지영, 한정인
영상: 57STUDIO

프로젝트 내용

10분 영상으로 만나는 소장품, 열린강좌 – 미술관소장품강좌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이 들려주는 소장품 이야기

1. 박생광 Park Saengkwang, 전봉준 Jeon Bing-jun, 1985
2. 고희동 Ko Huidong, 자화상 Self-portrait, 1915
3. 채용신 Chad Yongshin, 고종황제어진 Portrait of Emperor Gojong, 1920
4. 김환기 Kim Whanki, 론도 Rondo, 1938
5. 이응노 Lee Ungno, 군상 Crowd, 1986
6. 구본웅 Gu Bonung, 친구의 초상 Portrait of a Friend, 1935
7. 권진규 Kwon Jinkyu, 지원의 얼굴 Jiwon’s Face, 1967
8. 신학철 Shin HakChul,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Who Said They Saw the Sky?, 1989
9. 이쾌대 Lee Qoede, 여인 초상 Portrait of a Women, 1940s

10. 박래현 Park Rehyun, 노점 Open Stalls, 1956
11. 오윤 Oh Yoon, 춘무인추무의 No Sowing in the spring, No Harvest in the fall, 1985
12. 이승택 Lee SeungTaek, 무제 Untitled, 1980

권진규, 지원의 얼굴, 1967

오늘은 권진규의 작품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금 보시는 작품은 작가의 거의 만년에 해당하는 1967년 작 <지원의 얼굴>이라고 하는 작품입니다. 재료가 ‘테라코타’라고 하는 독특한 장르입니다. 흙을 빚어서 구운 거지요. 흙이라는 소재를 직접 표면에 노출했다는 사실이 같은 입체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흙이 주는 그 맛, 그 맛이 잘 살아 있는 인체 상반신 성형입니다.

Kwon Jinkyu, Jiwon’s Face, 1967

Today, we will examine a work by Kwon Jinkyu. What you are looking at here is Jiwon’s Face, produced in 1967, in the later part of his career. It is made from a unique material: terracotta. In other words, clay is shaped for firing. Notice how the exposed surface emphasizes the distinctive quality of the clay, as compared to other three-dimensional works It depicts the upper half of a body.

작품을 좀 자세히 보면 젊은 여성의 정면상이네요. 정면을 향해서 얼굴을 곧추세우고 멀리 응시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스카프의 형태가 있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그런데 일반적인 입체 작품하고 비교가 되는 특징은 어깨를 과감하고 가파르게 생략했다는 뜻입니다. 큰 틀에서 봤을 때는 일종의 수행자 같은 모습 그런 분위기가 있는 여인상의 되겠습니다. 권진규는 이와 같은 두상 작업을 많이 제작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얼굴을 만든 자소상 비구니상이라든가 또 이렇게 젊은 여성상을 다수 제작했는데 70년대 즘에 개인전 그 팜플렛 표지가 기억납니다. 이와 같은 작품을 중첩시켜서 여러점을 반복해서 이미지를 정리해 놓고 앞부분에 자기 얼굴로 대체한 사진이 있습니다. 그 뜻은 자소상이나 여성의 얼굴이나 혹은 비구니 얼굴이나 동일시했다는 뜻이겠지요. 그만큼 이 정면 초상 조각을 통해서 작가의 진실된 내면의 세계를 그 울림을 담으려고 했던 제작 의도가 읽어집니다.

특이하게 해방 이후인 40년대 후반에 일본을 유학하러 갔지요. 대부분에 일제시기 때에 유학갔던 선배 세대들과 달리 해방 이후의 50년대에 일본서 활동한 그런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일하기 전에 큰 이력을 본다면 일제 말에 속리산 법주사에 미륵대불이라고 하는 김복진의 대작 있습니다. 재료가 시멘트라고 하는 아주 특이한 형식의 불상 작품이 있는데 작가가 39세 요절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게 되지요. 그래서 그의 제자인 김복진의 제자인 윤효중이 마무리 작업을 했는데 거기에 권진규도 참여해서 불상 제작에 경험을 쌓은 바 있습니다. 이쾌대 라고 하는 1940년대에 대표적인 화가가 있습니다. 그 이쾌대 문하에서 미술 입문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Looking closely, we can see that it is a frontal image of a young woman. She seems to be staring straight ahead off into the distance, with an erect neck. You can see that she’s wearing a scarf, and her facial features are well defined. Unlike similar sculptures, however, the shoulders are extremely simplified, rendered as steep lines. Overall, the figure conveys a religious impression, like some type of an ascetic. Kwon Jinkyu produced many busts like this one. Some of them were sculptures of his own head, or the heads of Buddhist nuns In fact, he produced many busts of Buddhist nuns and other young women. I remember the pamphlet from one of his solo exhibitions, , I think it was in the 1970s. The cover of the pamphlet showed a photo juxtaposing several of Kwon’s head sculptures with an image of his own face in the center. I guess it was meant to equate his face with the women’s faces, or the faces of Buddhist nuns. So we can guess that his intention with these busts was to capture the resonance of his most sincere inner mind.

Significantly, Kwon Jinkyu went to study in Japan in the late 1940s after Korean independence in 1945. While many Korean artists had studied in Jap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Kwon went there after independence, and was active in Japan in the 1950s. To briefly examine his career before going to Japan, we should start with Kim Bokjin’s Maitreya sculpture, a masterpiece of the late colonial period, located in Beopjusa Temple on Mt. Songni This unique Buddhist sculpture was made from cement, but it remained unfinished, because Kim Bokjin died when he was just 39 years old. So his student Yun Hyojoong decided to finish the work, and the young Kwon Jinkyu was part of the project, so he gained experience in producing Buddhist sculpture. We should also mention Lee Quede, one of the most important Korean painters of the 1940s, who was imprisoned by the US Army in the Geoje POW Camp during the Korean War, and later chose to go to Pyongyang, North Korea.Kwon Jinkyu studied art under Lee Qoede. So Kwon studied under two of the greatest artists of the time, Kim Bokjin and Lee Quede.

권진규는 특이하게 해방 이후인 40년대 후반에 일본에 유학하러 갔습니다. 일본에 가서는 무사시노 미술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학습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상적인 다양한 인물상 이라든가 동물상이라든가 또 약간의 추상 작업같이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지금 보시는 것처럼 테라코타 작업을 했습니다. 흙이라는 그 물성을 강조한 그런 의미가 있겠지요. 물론 전통적 방식인 건칠기법도 사용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것은 삼베라든가 종이라든가를 활용하면서옻칠로 계속 두께를 주면서 작업하는그런 입체 작품의 전통 방식도 활용한 독특한 작가가 되겠습니다.

시대가 작가에게 어울리지 않았는지 시절 인연이 아직 안 왔는지 작가 생전에는 그렇게 크게 대중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는 안타까운 사연을 남깁니다. 서울 돈암동(현 동선동) 작업장에서 스스로 이승을 떠나게 되는데요.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이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생 무상을 말했는데 사실 그의 예술 세계는 무상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의 인물상 구원의 여인상 이런 것으로 울림을 남기게 된 아주 특이한 작가가 되겠습니다. 권진규는 한국 조소예술사에서 특히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아주 독특한 세계를 만들었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날 권진규의 미술사 쪽 위치는 최고 정상급에 있는 조소 예술 작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분야의 아주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예술세계를 만든 대표적인 작가로 권진규의 이름은 미술사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권진규 작가가 남겨준 그 예술세계에 울림은 지금도 상당히 커서 잔잔하게 우리 관객들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원의 얼굴>과 같은 이 작품이 권진규의 대표작으로 인정하고 있는데요.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이 젊은 여성의 표정 표정이 전해주는 그 깊이 어떤 울림, 공명 이런 것이 널리 지금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권진규의 이름은 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67년 작 지원의 얼굴 권진규의 테라코타 작품 대표작으로 꼽히는 테라코타 작품을 통해서 또 다른 입체 예술의 어떤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기대해 봅니다.

Then in Japan, he attended Musashino Art University. He had a very wide artistic range, from representational statues of people or animals to somewhat abstract sculptures. Although Kwon made some bronze sculptures, he primarily produced terracotta works, like this one. That seems to imply that he wanted to emphasize the materiality of clay itself. Notably, he also utilized the traditional technique of dry lacquer. Many of the surviving Buddhist sculptures from the Joseon dynasty were produced with this dry lacquer technique. Several layers of hemp or paper are coated with lacquer and attached to a wood surface, to enhance the three-dimensional quality. Again, Kwon Jinkyu was unique in using this traditional method in his modern sculptures.

Maybe he was ahead of his time, or just unfortunate, because he didn’t receive much attention from the public during his lifetime. This was a factor in his premature death, as he committed suicide in his studio in Donam-dong, Seoul. His last words were, “Life is emptiness and destruction.” Although his last words were about the transience of life, what he manifested in his art was not so much transience as the image of eternal salvation, or the woman as the image of salvation. In the history of Korean sculpture, particularly by the late twentieth century, Kwon Jinkyu occupies a singular domain.

Today, he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best sculptors in Korean art history. At least we can say that the negligence of the public during his lifetime has been reversed. We usually divide three-dimensional artworks into two categories: carving a form from a larger mass (like with wood or marble), or molding a form, as with clay.In this field of three-dimensional art, Kwon Jinkyu set himself apart with his unique and independent style.So he is highly acclaimed both in art history and among the general public. But the art that he left behind for us caused such great reverberations that they are still resonating with people to this day.

Jiwon’s Face is considered to be one of Kwon Jinkyu’s representative works. The depth, the resonance, and the unity delivered from every detail of the expression on this young woman’s face, looking straight ahead, continue to emanate I think that’s why Kwon Jinkyu is so highly regarded in art history.I hope that Jiwon’s Face (1967) by Kwon Jinkyu from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this magnificent terracotta bust that is Kwon’s representative work, will give you a new appreciation for the true beauty and essence of three-dimensional art.

신학철 Shin HakChul,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Who Said They Saw the Sky?, 1989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많은 질문을 던져 주고 있는 그림입니다.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시리즈 중에 한 작품이죠. 일견 이 그림을 보면 상당히 특이한 그런 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크게 봤을 때 기본적으로 하늘을 향해서 상승하는 수직 구조이네요. 아래부분에 근대기에 다양한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던 인물 물론 그 중에는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익명의 어떤 민중이 무수하게 바탕을 장식하고 있고 또 상승하면서 역사의 현장의 주역일 수 있는 그러나 이름을 또 모르는 상당한 인물들 그러면서 현대사에 부분의 상층부에 있습니다.

Shin HakChul, Who Said They Saw the Sky?, 1989

Who Said They Saw the Sky? This is a painting that asks many questions. The artist is Shin Hak-chul, and it is from his series entitled Korean Modern History. The first thing to notice is the unusual composition. Overall, it has a vertical structure that rises toward the sky. At the bottom, there are various people representing the modern history of Korea. Of course, many of the people at the bottom of the painting are anonymous. Moving upwards, the people become more prominent, yet still anonymous depicting those who could play a leading role in history. Those in the upper part represent the contemporary era.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참 울림이 있는 제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1980년대 들어오면 우리 미술계에 지형이 상당히 다르게 됩니다. 이른바 제도권과 민중권이라고 하는 양대의 진영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그 전에는 모더니즘 중심으로ㅜ우리 미술계가 하나의 제도를 이루고 있었다면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써의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새로운 발언을 하기 시작하죠. 사회의식이라든가 현실, 시대정신 이런 것을 기본으로 해서 민족이 뭔지, 사회가 뭔지 이러한 거대담론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존의 미술계 판도에 양분했다 할 정도로 새로운 화풍,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게 됩니다. 나중에 민중 미술이라고 불리는 그런 일련의 미술 운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지금 이 작품의 작가인 신학철 작가도 80년대에 새롭게 두각을 나타내는 아주 독특한 화풍의 작가입니다. 원래 신학철 작가는 모더니즘 계열로 미술계에 입문했고 또 나름대로 작가적 기반을 닦고 있다가현실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지요. 그러면서 자기의 역량을 과시하게 되는데 그때 나타난 작품이 한국 근대사 혹은 한국 현대사 시리즈를 아주 대작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작가가 역사를 현실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연출된 어떤 특정 광경이라고 볼 수 있지요. 콜라주란 형식으로 많은 작품을 했고또 유화 작품임에도 독특한 형식을 구사하는 그런 작품이 됩니다. 역사를 작가는 어떻게 해석했는가 그 해석한 방식을 이렇게 조형언어로 발표하는 그런 형식을 갖게됩니다. 80년대라는 것이 군사 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반대적으로 민주화운동이 치열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 치열한 현장과 역사의식과 시대정신 이런 것이 골고루 녹아서 이룩된 시리즈의 한 작품이 되겠습니다.

Who Said They Saw the Sky? I think this title has such a deep resonance. By the 1980s, the field of Korean art had undergone major changes, dividing into two main camps:institutional art vs. Minjung art. Before that, the Korean art world was dominated by a strong focus on modernist art. However, groups of young artists began to raise their voices to resist the dominance of modernist art. With an elevated social consciousness, fueled by the conditions and spirit of the times, they started pursuing grand discourses, including what a nation or what a society should be. This led to a new painting style that came through like a fresh breeze, dividing the existing art field in two. This is how the movement later called “Minjung art” was formed.

Shin Hak-chul, who made this painting, emerged in the 1980s as an artist with a very original style. After entering the art field as a modernist and building his artistic foundation, Shin Hak-chul opened his eyes to social realities and started demonstrating his true capacity. He began to produce his Korean Modern History series, which explored the theme of modern history on a grand scale. The series can be viewed as a restaging of scenes from history according to the artist’s own interpretation of reality. Many of these works combine methods of collage with oil painting for a highly unique style and composition. That is, the format of the series is an attempt to express the artist’s interpretation of history through the language of formal aesthetics. In Korea, the 1980s were still the period of the military regime, but also the fierce struggles of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against the military regime. In this painting, as in the entire series, the artist evenly blended those intense conflicts with a deep awareness of history and a spirit of the times.

역사와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발언이 담겨져 있지요. 미술계에서 이런 문제 제기를 했다는 자체가 아주 독특한 상황을 증명해 주고 있고 그런 내용이 오늘날에는 국제무대에서 80년대 이 미술 운동이 학술적 연구의 대상이 되어서 많은 또 연결 대상이 된 결과로 논문이 나오고 있고요. 이러저러한 전시나 출판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주목한다는 뜻이겠지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다시 이 작품을 자세히 한번 보겠습니다. 익명의 그러면서도 역사의 주인공을 의미 하지 않나 그래서 비록 익명이지만, 무명이지만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를 부둥켜안고 있는 인물 이런 인물이 무수한 속에서 한 분일 텐데 이런 인물들에 의해서 우리 근대, 현대 역사가 이렇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 모습 그래서 19세기 말 동학농민전쟁 시절부터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현장까지 이뤄지는 근현대 역사를 작가가 해석한 모습 바로 이런 도상으로 특화됐다 볼 수 있습니다. 신학철이란 작가는 이렇듯 역사와 현실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독특한 화풍으로 80년대 이후 주목을 받는 작가로 이름을 높게 떨치고 있습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실지 저도 궁금합니다.

It also contains his thoughts reminding us of that history and reality. The production of such works of “committed art” was totally unique to Korea in the 1980s, and this art movement has now become the subject of wide research, leading to the various exhibitions and publications. Perhaps this means that the movement’s uniqueness has been recognized and confirmed. Now, let’s look more closely at this painting I think it represents an anonymous person, who is still a protagonist of history. Despite being anonymous, this person still embraces history at the very site where history is taking place. It is through people like this that our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changed and developed. This image contains the artist’s full interpretation of Korea’s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from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of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of the 1980s. Since the 1980s, Shin Hak-chul has been renowned for his innovative style and independent interpretation of history and reality. Who Said They Saw the Sky? I’m curious to know how you would answer that question.

이쾌대, 여인 초상, 1940s

오늘은 이쾌대의 여인 초상 >이란 작품을 같이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쾌대라는 화가의 이름을 부르면 왠지 가슴에 잔잔한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20 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을 수 있는데 그의 일생을 보면 순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 때 일본유학을 했고 또 해방기를 거쳐서 20 세기 후반부는 월북화가로 북에서 활동하다가 이승을 떠난 그런 작가입니다. 이쾌대가 주는 울림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인체묘사에 탁월한 사실력을 바탕으로 리얼리즘 미술을 새롭게 전개했고 또 시대상황을 자기 작품에 반영하면서 새로운 예술세계를 지향했던 아주 탁월한 대가형의 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Lee Qoede, Portrait of a Women, 1940s

Today, we are going to take a look at Portrait of a Woman by Lee Qoede. Every time I say his name -Lee Qoede- I feel a subtle reverberation in my heart. That’s because his life was very turbulent, even though he was one of Korea’s greatest painters of the 20th century. He studied in Japan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then after independence, he defected to North Korea where he was active for a while before he died. Lee Qoede’s art resonates in many different ways. With his talent for depicting the human body, he advanced the style of realism, but his art also reflects the social conditions of his era. He can be considered a master painter who aimed to enact a new world of art.

이쾌대는 경상북도 칠곡 출신으로 대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쾌대는 대지주 집안으로 일본유학을 다녀왔습니다. 제국미술학교 그러니까 오늘날, 무사시노미술대학 출신인데요.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40 년대에 우리 한국 작가끼리 새로운 미술 단체를 만듭니다. 신미술가협회 인데요. 신미술가협회는 도쿄미술학교같은 관립학교가 아닌 사립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동인입니다. 다양한 진취적인 진보적인 이런 화풍을 구사한 화가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쾌대의 탁월한 일종의 지휘 감각이라고 할까. 시대를 잇는 그런 회한 이런 것이 신미술가협회에 반영되었습니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 시에 포로가 돼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용되는 이런 또 인생의 극적반전을 이루게 되지요. 포로 석방 당시 이쾌대는 서울에 가족이 남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평양 미술계에서 활동을 하다가 이내 미술계 전면에서 사라진 그런 불운을 갖고 있는 이쾌대라 하겠습니다. 월북화가이기 때문에 반공문화가 두드러졌던 20 세기 후반 남한사회에서는 이쾌대란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그런 금기 작가였지요. 1988 년 해금조치가 이루어져서 90 년대 초에 유족이 비장(祕藏)했던 이쾌대의 작품을 처음으로 공개하게 됩니다. 그 당시 미술계에서는 커다란 사건이라고 볼 수 있었지요. 이쾌대 유작을 살펴본 미술계의 많은 인사들은 일단 일제 강점기 시절에 그와 같은 유화의 대작을 가지고 있다는 점, 대부분이 인체의 묘사에 탁월함을 보여줬고 리얼리즘 정신이 이쾌대라는 화가를 20 세기 대표화가로 하나의 큰 거목으로 인정하게 된 그런 계기가 되었습니다.

Born in Chilgok, North Gyeongsang Province, Lee Qoede spent his childhood in Daegu. Lee Qoede was from a large landlord’s family, and could thus afford to study in Japan at the Imperial Art Institute, which is now Musashino Art University. After graduation, Lee established Sinmisulga hyeopoe (Association of New Korean Artists), an art group for Koreans in the 1940s.The Association of New Korean Artists was composed of artists from private schools, rather than government schools(- such as the Tokyo Fine Arts School). So these artists had more diverse, liberal, and progressive styles.Lee Qoede was a type of chairman or moderator for, provided excellent leadership and social concern hat was reflected in the group’s works and activities.

But Lee’s life took a dramatic turn during the Korean War, when he was taken as a “North Korean” prisoner and sent to the POW camp in Geoje. Upon his release, he chose to go to Pyongyang, North Korea, despite the fact that his family was in Seoul. At first, he was active in the art field of Pyongyang, before disappearing from the forefront. Since Lee had defected to North Korea, South Koreans were not allowed to discuss him or his career in the second half of 20th century, due to the strong feelings of anti-communism. After the ban was finally lifted in 1988, Lee Qoede’s works,which were still in the possession of his family, were unveiled for the first time in the early 1990s. It was a huge event in the Korean art field at the time. Many people in the art world who had never seen Lee Qoede’s major works in person were amazed that he had produced these large oil masterpieces under the harsh conditions of Japanese colonial rule. They were equally impressed by his skills for portraying the human body and his spirit of realism. As such, Lee Qoede was recognized as one of the great Korean artists of the 20th century.

약 한 60 여 점의 유화와 또 300 여 점의 드로잉을 남겨 놨는데요. 이 작품만 가지고도 20 세기의 거성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북에 가서는 초기에 활동을 했지만 이내 북에서도 금기의 작가로 불행한 만년을 보내게 됩니다. 90 년대 후반 평양에서 『조선역대미술가편람』 이라고 하는 미술인명사전이 발간되었는데요. 초판에는 이쾌대라는 항목이 없습니다. 재판에 이쾌대라는 항목이 등재되면서 복권을 한 그런 불운의 상징 남북 분단의 상징 이쾌대가 되겠습니다. 이 작품을 보시면 이쾌대의 특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인체에 아주 정확한 묘사 그것도 당당하게 인체를 묘사하는 그런게 이쾌대의 화풍의 특징이 담겨 있습니다. 이 여인 초상은 아주 단정한 그런 붉은 저고리에 상반신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쾌대의 작품치고는 소품에 속하는 데 비록 규격은 작지만 상당히 짜임새있고 구성적으로 독특합니다. 배경을 까맣게 처리하고 인물의 표정을 강조한 그런 모습이 되겠습니다. 이쾌대 작품의 인물 특징은 뎃생력이 정확하기 때문에 부분부분에 그 윤곽선에 대해서 선을 강조한다던가 음영의 처리라던가 이런 그 당당함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사실적 묘사력이 바탕에 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이쾌대는 30 년대에 서사적 바탕에 작품을 그리다가 해방기에는 군상 시리즈로 대작을 남깁니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인체가 한 화면에 담기게 되는데요. 서구 고전적 이런 분위기도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다 우리 한국인이고 배경도 우리 시대 상황을 바탕으로 한 그런 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상 연작을 제작한 화가로서 20 세기의 대표적 묘사력을 가지고 있는 어떻게 보면 혁명적 사실주의에 가깝게 가려고 했던 낭만적인 풍모도 있지만 두루두루 자기 세계를 특화 시키려고 했던 그런 화가가 되겠습니다. 이쾌대는 분단 시대가 낳은 화가입니다. 이 작품이 주는, 비록 소품이지만 울림이 적지 않은 걸 확인하게 합니다. 우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인 초상> 소장품의 하나로 자랑스럽게 추천할 수 있는 그런 이쾌대의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Today, we have about 60 extant oil paintings and 300 drawings by Lee Qoede. From these works alone, we can see that he is a giant of 20th-century art. Initially after he defected, Lee was active in North Korea, but he was soon blacklisted, so that the later part of his life was very difficult. In Pyongyang, a biographical dictionary entitled Korean Artists Handbook was published in the late 1990s. While Lee Qoede was omitted from the first edition, he was reinstated for the second edition. Since his life closely mirrored the division of North and South Korea, Lee can be seen as a symbol for our national tragedy.

This painting contains all the characteristics of Lee Qoede’s style. It exemplifies the main features of his style of depicting the human body with great precision and confidence. This portrait of a woman shows her upper body wearing a fine red traditional top called a “jeogori.” Although it is relatively small compared to some of Lee Qoede’s other paintings, it has an excellent structure and unique composition. The background was rendered in black, thus emphasizing the woman’s facial expression. Because he drew so accurately, Lee Qoede was able to emphasize his brushstrokes in parts of the outlines, and to show off his boldness and confidence in shading. His skills for realistic depiction are what enabled him to do this.

In the 1930s, Lee Qoede produced narrative-based works and then after independence, he painted the masterpieces of his Group Portrait series. Such works resonate with the sheer size and dynamism of the figures on the pictorial plane. While these figure paintings carry the general aura of Western classicism, all of the people are Koreans, and the backgrounds reflect the Korean society of the time. As the creator of the Group Portrait series, Lee was one of the greatest portraitists of the 20th century. In some ways, he was a bit of a romantic in his approach to revolutionary realism, but at the same time, he always strived to forge his own style. After all, Lee Qoede is a painter born in the era of division. Although not generally considered to be one of Lee Qoede’s major works, this painting still carries a deep resonance. That’s why Portrait of a Woman is a work by Lee Qoede that I can proudly recommend s one of the highlights of our museum’s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