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 아시아의 사진 : 김한용 구술사
2015
Client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Project ✍️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 아시아의 사진 : 김한용 구술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 아카이브
아시아의 사진 : 김한용 구술사
2015

Asian Culture Center
Archive & Research
Photography in ASIA : Oral History Kim Han yong
2015

작업 소개

이 컬렉션은 ‘아시아의 사진’ 아카이빙 프로젝트의 한국에 관한 자료 컬렉션 중 하나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의 원로 사진가들의 생애사에 대한 구술을 기록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한국 사진사의 부족한 서술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사진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서울 지역 주류 사진계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상당수가 정리되고 있는 반면, 사진계에 충분한 자료를 남기지 못했거나, 서울 이외의 지역 사진가들은 상대적으로 여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예술사진 영역이 아닌, 실용적 영역에서 활동했거나, 지역에서 활동한 사진작가들을 적극적으로 포괄하였다.

정정회 구술사
Oral history Cheung Jung Hoi

강봉규 구술사
Oral history Kang Bong-gyu

김한용 구술사
Oral history Kim Han yong

임정의 구술사
Oral history Lim Chung-eui

크레딧 보기

크레딧:

구술자: 김한용
아시아의 사진_구술채록 책임연구원: 정주하
아시아의 사진_구술채록 연구원: 유지의, 현지연
정보원 예술감독: 김선정
진행: 정주영, 노해나
영상 및 음성기록: 스튜디오 것(윤유성)
영상구성 및 편집: 57스튜디오(이미지)
번역: 박재용
자료협조: 김한용, 김진희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주관: 아시아문화개발원 정보원사업

‘아시아의 사진’은 사진을 통해 아시아 각국의 근현대사를 조망하는 컬렉션으로 아시아 사회, 정치 및 문화를 기록한 4명의 사진들과 사진가들의 구술 채록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은 아시아가 근현대를 거쳐 오면서 사회와 문화를 기록해 온,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매체였다. 수십 년 전의 도시 공간, 건물, 공장, 광고사진, 보도사진은 이제 사실성을 전달하는 임무에서 벗어나 당시 문화와 역사를 기록한 시대상의 보고로 인식되고 있다. 수집된 컬렉션은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근대의 격변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또한 원로 사진가들의 생애사 구술 채록 영상은 생생한 증언을 통해 사진 기록의 서사적 공백을 보완해 줄 것이다. 향후 대만,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전역으로 수집 범위를 확장하여 아시아 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출처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 문화예술 전문 주제 아카이브 전시’’ 中 ‘아시아의 사진’ 전시 소개글

(정주하)
봉천제일고등학교 공업학교에서 인쇄과를 그러면 졸업을 하셨지요? 사학년 다 마치시고요. 그런 다음에 거기서 졸업하시고 나서는 어디로 가신거예요.

(김한용)
신경이라고 만주의 신경이 수도란 말이여요.

(정주하)
신경이라는 곳이.

(김한용)
만주국이지. 왜정시대니까. 만주영화주식회사. 영화 제작하는데. 그래 시험을 치라고 그래요. 그 시험에 두 사람이 와가지고 시험을 쳐서 합격했어. 근데 어머니가 ‘아이, 너 군대, 앞으로도 군대 나갈 건데 거기 가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못가게 울어요. 그래서 포기를 했지.

(정주하)
주식회사 가는 걸 포기하셨구나.

(김한용)
내 잘못하면은 그 만영의 영화 촬영하는 사람이 될 뻔 했지.

(Jung juha)
You studied printing at Bongchun Jeil Technical High School. You graduated after 4 years. Where did you move after you graduated from the school?

(Kim Han yong)
I went to Xinjing, which was the capital of Manchuria.

(Jung juha)
Where is Xinjing?

(Kim Han yong)
In Manchuko,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Manchuria Film Corporation. It was a place for producing films. And they told me to take a test. Then, two of us came and I passed the test. But my mother went to tears, “You will be away for the military. Don’t leave now.” So I gave up.

(Jung juha)
You gave up the opportunity.

(Kim Han yong)
So, I could have become a camera director at the Manchuria Film Corporation.

(정주하)
봉천공업확교에서는 사진도 가르쳤던 모양이에요. 인쇄과에서.

(김한용)
그 때 사진 수업도 하고 그랬잖아요. 거기서.

(정주하)
어떤 사진 수업을 하셨나요?

(김한용)
사진 촬영하는 거, 현상하는 거, 다 약타는 방법. 그때는 그 약을 다 타서 조제합니다.

(정주하)
그렇죠. 그 천칭 같은 걸로 해서 뭐 메톨, 하이드로퀴논…

(김한용)
그런 거 다 알고 또 제판 그걸 이제, 그 때는 석판에다 올려요. 올려서 인쇄하는 과정인데, 또 그러구 동판 하는 그 과정 다 알고 그러지요. 그 유리에다가 이렇게 얼굴해가지고서 말려서 얼굴 사진 찍는 거지.

47년에. 이제 우연히 그 인쇄소, 인쇄 경험이 있고 사진도 하니까 어찌 얘기가 통해가지고 제깍 취직이 됐지.

『국제보도』

국제보도연맹이라는 데서 발간했지. 해방 후.

3.1절이나 뭐 이런 거.
연극 하는 거,
전람회. 소식.
행사 사진하고 문화계 소식. 그런데 회사 사장이 화가야. 그래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전람회 할 때마다 찍어다가 실어 놓고 그랬지.

한국의 유명한 사람들의, 작가들 사진이 실렸었어요. 근데 그때 나는 뭐 아주 초보자니까 그 높은 사람들 말이야, 유명한 사람들, 해서 사진 내가 가서 가져오기도 하고 내가 한 사람이야. 그랬지. 사진기자니까.

(Jung juha)
Did the school have photography courses?

(Kim Han yong)
There were photography courses, yes.

(Jung juha)
What did they teach?

(Kim Han yong)
How to shoot photos, how to develop films, and how to work with chemicals. We all did the chemicals by ourselves, then

(Jung juha)
Right. With a scale. Metol, Hydroquinone, and Alginate Sodium… I knew all of them.

(Kim Han yong)
And the plate making. We did the plate making on stone panels. It’s process of printing photos. I also knew about the copperplate process. You put the reflection of a face on a glass plate, and dry it to make a photo of a face.

It was in 1947 when I got a job at a printing shop. I said I had some experience in printing and photography. I took photos for the International Publicity League of Korea. I took photos of events like the independence day of Korea, theater performances, exhibitions, and other occasions… For those events I made photos, and the owner of my company was a painter. So I photographed exhibitions a lot. We publicized photos of well-known figures and famous artists. But I was a novice then. So I often visited them to pick up their photos. I did so since I was a photo journalist.

(김한용)
『대외 육군화보』라는 것이, 6.25 당시 우리나라에 와서 참전한 사람들, 그게 지금 전 세계적으로 16개국이랍니다.

(정주하)
그렇죠. 예.

(김한용)
16개국인데, 그 16개국에 그 우리 대한민국의 일 년의 행사라든가, 그…… 군의 동향을 종합적으로 찍어서 그걸 16국에 보내는 거여요. 16개국의 언어 번역으로 해서.
우선 논산 기본훈련, 기동훈련, 각 부대의 행사, 군이 들어가는, 육군이 들어가는 거. 그러니까 논산은 매년 가야되고, 기동훈련도 매년 가야되고, 매년 전방에 나가서 사진도 찍어야 되고.

The Army Pictorial News was a photo book for the soldiers from other countries for the Korean War. We sent it to sixteen countries around the world. The book was about different events in Korea throughout the year, recorded for those in these sixteen countries. It was translated into sixteen different languages. The basic military training camp, training sessions, and Army events. So I had to visit the training camp every year. I also had to go to the trainings and the fore front as well.

59년 2월에 그만두고 내가 다방에다가 사무실을 맨들어 놓고, 사진 하나 갖다가 줘서 맨들어 놓고, 거기서 연락소를 맨들어 놓고, 그기 있다가, 한 보름 있다가, 그 『부산일보』 지사장을 만났어. 지사장 만나서, 아, 날 참 잘 만났다. 서울서 일어나는, 사진을 찍어서 필름을 주면 된다 이거야. 행사 있을 때마다. 오라고 할 테니까.

그리고 보름을 일했는데, 한 달 거 월급 4만 원을 주더라고, 그래 집안이 확 풀렸지. 그렇게 몇 년 한 1,2년 하다가, 59년도인데, 그렇게 하다가, 친구가 “영화를 하나 제작을 하겠는데, 영화스틸 좀 맡아다오.” 그러면서 돈 20만 원을 주더라고. 아 이거 돈 20만원 생겼으니까 횡재지. 그래서 충무로에다가 김한용사진연구소 간판을 걸고 사진을 거기서 시작된 것이 59년도 9월 달.

I quit the job in February 1959 and set up my office in a coffee shop. I hung a photo there and made it my contact point. Then one day in the same year, A friend of mine produced a film and told me, “I make a film. Please do the still images.” And he paid me 200,000 Korean Won. I was lucky to get that much money then. In September 1959, I opened the Kim Han-yong Photo Studio in Chungmuro.

그 《청년 이승만》을 내가 60년에 했잖아. 70만원 받고 그 영화 견본, 견본을 만들어주고, 진짜 스틸을 할 땐 별도로 돈 받기도 하고. 그때 돈 70만원이면 큽니다. 한 열 편 가까이 내가 찍었어. 《두 남매》 찍었어요.

(정주하)
네, 그다음에 그 정확한 제목이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김한용)
아, 맞습니다.

(정주하)
그거는 이제 1959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열 없는 살인》?

(김한용)
네. 《정열 없는 살인》,

(정주하)
그것도 촬영하셨군요. 그다음에 60년에는 여러 편 찍으셨어요. 《죄 없는 청춘》, 《청춘화원》, 그다음에 61년에는 《나그네》 라는 작업, 기억나세요? 《나그네》? 《사랑이 문을 두드릴 때》, 그담에 《악의 꽃》

(김한용)
《악의 꽃》, 맞습니다.

(정주하)
그담에 그 이듬해에는 《귀향》, 그담에 《인목대비》, 《꿈》, 그담에 《그늘진 순정》 이런 한 10여 편 이상의 선생님 스틸 작업하신 게 있네요? (웃음)

(김한용)
네.

(정주하)
그런, 이런 스틸작업 하시면서는 즐거웠던, 혹은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뭐 있으신지요?

(김한용)
그런데 이제 그, 나는 남달리 모든 일에 임하면 거기에 모든 집중을 합니다. 그래서 카메라, 영화 찍는 카메라 옆에 반드시 옆에 숨어 있어요. 딱 있다가 삼각대 그것도 준비해서 있다가 그게 인제 영화를 찍기 전에 한번 연습하지 않습니까. 연습할 때 좀 있다가 좋은 찬스, “잠깐!” 그러구 찰칵 찍습니다. 그게 습관화돼서 내가 서너 딱지는 내가 잠깐 가만있거든요. 이거 흔들리면 안 되니까. 그래서, 그래서 아주, 아주 딱 카메라 옆에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찍으니까, 그 인제 연습할 때 찍은 거니까, 연습할 때 좋은 찬스 있으면은 소리 질러서 “잠깐!” 할 때 이미 착 찍는 거지요. 좀 특별한 사람입니다. 음성이 또 커가지고서, 쨍쨍 울리지요, 그러니까.

I did stills for “Young Rhee Syngman” in 1960. I was paid 700,000 Korean Won for the job. I made pre-production images. I was then paid again for actual still photos. It was a big money then. I did still for about ten films. I also did “Two Brothers and Sisters.”

(Jung juha)
You did stills for “Independence Association and Young Lee Shung-Man” which was released in 1959. Then you did “A Murder without Passion” in 1960. And you did many in the year 1960. “A Sinless Youth.”

(Kim Han yong)
Right.

(Jung juha)
“A Youth Garden.”

(Kim Han yong)
Yes I did.

(Jung juha)
You did “A Wayfarer” in 1961. Do you remember? “When Love Locks.” And “A Flower of Evil.”

(Kim Han yong)
What? Oh, yes.

(Jung juha)
A year after you did “Home Coming.”

(Kim Han yong)
Yes, I did.

(Jung juha)
“Queen Dowager Inmok”, “Dream,” and “Shaded Love.” You did more than ten films, then. Do you have any memorable episode from your experience of creating still images for films?

(Kim Han yong)
Unlike the others, I always devote myself to what I do. So I hide myself next to the camera. I am prepared with my tripod and… You know, they practice before the shooting. While the actors practice, I shout “Wait!” to capture a good image. I keep myself still for three or four seconds because I should not make my body unstable. So, I stand next to the camera and do my best for the job. So, I take the photos during the practice, I shout “Wait!” when I see a good chance. I have a special voice that is really loud.

『여원』에서 인쇄가 잘 나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인쇄가 잘나온 이유는 삼화인쇄에 주식[회사]에서 기술자를 독일 보내서 거기서 교육을 받고, 거기서 약품이라든가 기술을 다 배우고, 인쇄기를 다 사다가, 사와가지고 삼화인쇄서 처음으로 슬라이드로 찍은 원고를 색분해해서 교정 내서 인쇄한 것을, 삼화에서 제일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것이 1962년 1월호, 그것이 『여원』 표지가 대한민국에 칼라로 나온 게 처음이라 생각해요. 그 다음에 이제, 우후죽순 격으로 칼라가 잘 나오니까, 그 기업체에서 칼라로 광고도 하고.

The print quality of Yeowon magazine was solid. Samhwa Printing sent an engineer to Germany to understand the chemicals and techniques. They bought printing machines from Germany. Samhwa was the first country in Korea to do color separation and correction before printing publications. The front page of the January 1962 issue of Yeowon magazine was the first color-printed in Korea, I think. Then, the quality and quantity of color printing were improved. Corporations started commissioning advertisements in color.

처음에는 일이 없었습니다. 일이 없어서 애를 먹다가, 그 삼화인쇄소에서 무슨 그…… 도록에 무슨 제품 같은 걸 찍게, 조금씩 하다가,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여원 그 표지를 찍으면서 표4에다가 이제 그 비락, 비락이 뭔가 하면 우유여요. 비락우유. (웃음) 그게 아마 광고로서는 처음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한국의 예술인들, 문인, 예술인들 소재로 해서 그니께 63년도에 각 신문에 배부됐는데, 그때 모델료는 별도로 안주고 그 작가들을 동원해서 술집으로 불렀어요. 술집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찍어서 또 그게 책에 나온……. 술을 한차 사는 거지요. 술을 한턱내는 건데, 그리고 아마 모델료는 없이 맥주를 몇 상자씩 줬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비맥주라는 맥주회사에서 그 신문에 그 5단으로 나왔는데, 그 뭐 대한민국에서 아주 톱 예술인들만 불러다가 이제 몇 사람은 집에 찾아가서 찍었어요. 그, 화가 그, 김기창 씨는 집에 가서 맥주 마실 때를 집에까지 가서 찍고 해서 십오륙 명이 아마 등장했으리라 봅니다. 그때는 광고가 비교적 야 이런 예술인들이 마시는 그 참 장면은 직접 찍어서 광고 내니까, 그냥 술 마시는 걸 들이마시는 걸 찍곤, 그 모델한테 가서 얘기해서 술 몇 잔, 몇 박스 보내고 말이여. 참 그때는 원시적이었었지요. 그렇게 사람이 좀 다 가난했고, 유했고, 시간의 여유도 많았습니다.

(Kim Han yong)
I did not get commissions at first. I struggled, then I started taking photos of products at the Samhwa Printing… And I did a cover page of Yeowon magazine, I took a photo of Virak Milk package. That might have been my first advertisement photo.

(Jung juha)
Well, you mentioned that the first one you did was a photo of OB Beer bottles…

(Kim Han yong)
Yes, that I did in 1962.

(Jung juha)
Was it in 1962?

(Kim Han yong)
Well, no, it was in 1963. (Jung: 1963) I took photos of literary figures drinking beer… It was published as comments about the beer from writers. It was the first one, yes. The company invited writers, art people. The photos were advertised on newspapers. They didn’t pay the models but just invited them to bars and pubs. I took photos of them drinking then the photos were published…. It was simply buying them a drink. I guess that the company gave boxes of beer to them although they did pay them. The advertisement filled the bottom part of the newspaper. Those who were invited were top artists in the country. For some of them, I visited their houses for shooting. Well, I went to the house of Kim Ki-chang, the painter. (Jung: Kim Ki-chang the painter) About fifteen or sixteen people were in the photo I took for Kim Ki-chang. At the time, advertisement industry was not that sophisticated… Like we took photos of artists drinking by themselves for real. We just took photos of them drinking, paying them a few boxes or glasses of beer. It was so rudimentary. Everyone was a bit poor and soft. And people had much free time then.

(정주하)
네 그래도 굉장히 낭만.

(김한용)
재미있어요. 나는 또 술 한탕 마시는 거지. 그래서 몇 장 찍는 거지. (큰소리로 웃음)

(정주하)
그때 그러니까 오비맥주가 나온, 생산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김한용)
그렇지요.

(정주하)
가격도 비쌌지요?

(김한용) 또 그때는 오비맥주하고 크라운맥주가, 두 군데 있었는데. 경쟁이지요. 경쟁사가 또 심한 게 뭔가 하믄, 만약의 경우에 오비맥주에 있는 사람이 크라운을 먹었다 하면은 모가지입니다. 사표 써야 되요. 그래서 내가 “우리 둘이서 먹을 때야 좀 어떻습니까. 당신이 오비맥주지만 저는 크라운 마시면은.” 아 그럼 큰일 난다는 거예요. 그 사람 철저해요. 그래서 어느 해인가는 그 태현실을 모델로 쓰는데, 오비맥주하고 크라운맥주를 같이 이제 그 섞어서 이제 그 포스타를 찍는데, 그래서 내가 그걸 내가 적당히 배분하거든요. 그 라벨이 몇 개 보이느냐, 어디 위치에 있느냐 따라서 문제가 있는데, 아이 그 한번은 찍었더니, 아니 그 오비가 너무 좋다 이거여. 나는 오비 팬은, 원래 오비 팬입니다, 제가. 오비맥주 광고를 찍은 일이 있어서. 제가 그런데 크라운에서 노(No). 안 된다. 다시 찍어라. 그래서 다시 찍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니, 오비맥주와 크라운맥주를 같이 배열을 하는데, 그 비중을 똑같이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래서 낭중에 두 번째 찍을 때는 그걸 잘 조절해서 했더니 오케이 돼서 포스타가 나왔습니다.

(Jung juha)
It sounds very romantic.

(Kim Han yong)
It was fun. The shooting for me was a chance of a big drink. Then I took some photos. We had OB Beer and Crown Beer then. They were rivals. The competition was so fierce. A staff could be fired for drinking the other company’s beer. One had to quit the job. So I asked a Crown Beer employee, Why do you care so much about this even when we drink together? He said, “That never happens!” They are so strict about that. In one year, I had a same model for both companies. I made posters where both beers appear at the same time. I tried to keep the balance with the exposure of labels and the position of bottles. Then the Crown Beer company said, “NO.” They told me to take the photos again. So I had to do so. It is extremely difficult to have the exactly same exposure of two beer companies in one image. But I managed to keep the balance in the second shooting and was finally able to produce the poster.

(정주하)
아 그게 어떤 포스타길래 경쟁 두 회사를 같이 넣어서 사진을……?

(김한용)
그 사진을 찍은 걸 책에 나와 있어요. 제가 84년도에 회갑 때 맨든 책자에 나와 있습니다. 그걸 보면은 과연 크라운하고는 똑같은가는 자세히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튼 굉장히 나는 겁냈어요. 그 두 번째 재촬영했단 말여요. 처음엔 오비가 너무 강하다. 언젠 오비 선전이 너무 많다. 그래 안 된다. 똑같이 비중을 하라. 그 비중을 맞춘다는 게 상당히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래서 다행히도 그 비중을 똑같이 해가지고서 합격돼가지고 포스타가 나왔습니다. 처음으로

(정주하)
그 포스타는 무엇을 위한 포스타였습니까?

(김한용)
그것이 저 반절이에요.

(정주하)
크기는 반절정도 사이즌데, 무엇을 광고하기 위한 포스타였었어요?

(김한용)
오비가 그 크라운의, 그 맥주광고지요, 말하자면.

(정주하)
맥주를 광고하기 위해서 두 경쟁회사를 한꺼번에 넣어서 선전하는 거군요.

(김한용)
그렇지.

(정주하)
그때 그 사진촬영비는 어디서 받으셨어요?

(김한용)
아니 그건 양쪽에서 절반절반 받은 거지.

(정주하)
아 그래요? 그런 재미난 일을 그 이후에도 해보신 일이 있으세요?

(김한용)
없습니다. 그것이 시초고, 맥주를 포스타로 만든 게 시초입니다. 아 그리고 이제 각자 오비 이제 포스타를 찍어 뭐, 생맥주 나올 때 생맥을 찍었고, 흑맥주 나올 때 흑맥을 찍었고, 또 병맥주, 병맥주 광고를 계속 찍었습니다.

(Jung juha)
What kind of poster did you put the two rival beer companies at the same time?

(Kim Han yong)
It was an ad for beer in general.

(Jung juha)
That’s why you put the two companies together.

(Kim Han yong)
How were you paid then?

(Jung juha)
Both of them shared the cost.

(Kim Han yong)
Did you have any other interesting project after that?

(Jung juha)
No. And it was the first time to have a beer bottle in an advertisement. When I shoot photos for OB Beer posters, the kinds of beer in the photos changed over time.

그 60년 초반에는 아까 얘기한대로 미싱이라든가 광고가 있으면, 그 사장이 직접, 사장이 직접 그쪽 사장하고 어떻게 상의해서 찍어보자고 상의를 해요. 그러면 내가 모델을 추천하지요. 이 모델 어떻습니까? 해서, 하게 되면 하는 거지요.

근데 이제 그…… 광고대행사가 생기면은, 사진은 이제 일 년 계획을 해가지고서 그……, 계획을 세워요. 광고, 사진 가격이 얼마고 또 거기에서 사진 내용은, 광고 내용은 어떻게 해서 어떻게 하고, 그렇게 이제 거기에 의존해서 하기 때문에 사진하는 사람에 권익은 쪼금 소외됐죠.

말하자면 모델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자체 내에서 이제 에이전시에서 회사하고 연결해서 모델을 누구를 쓰고 돈 얼마주고 해야 된다는 거 다, 그전에는 다 내가 했어요. 내가 모델도 다 해서 추천하지. 이 사람 어떻겠느냐. 하여튼 연락이 잘 되요. 왜냐면 영화스틸을 찍었기 때문에 대충 다 알거든. 영화계 판도를 좀 아니까 부탁을 하게 되면 인제 시간을 내서 사진 찍고 그랬는데, 이제 조금…… 그때가 에이전시 생기면은 카메라맨이 한풀 가는 거지.

광고가 60년대에도 제가 일을 많이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코카콜라도 60년대고, 오비맥주, 그러고 동아제약, 일동제약 럭키, 금성, 삼성제약, 한일약품, 천도제약, 거 뭐 하여튼, 일을 제가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때 60년대에 이어서 그 제품들과 그 회사를, 모든 광고 일절을 60년에서 70년, 해서 80년까지 거의 끌다가 또 여기 우리 연구소에 있던 친구가 나가면서 가지고 나가서 하고. 그런데 그건 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대요.

In the early 1960s, the company owners discussed the details of their ads. I had to check with them for details, all by myself. After advertising agencies were established, photographers had a yearly plan about the price and the content of photos, together with the agencies. This has reduced the rights of the photographers. People with the camera were not as powerful as before.

For example, it was in the 1960s that I directed so many advertisement photos such as Coca-Cola, OB Beer, Dong-A Pharmaceutical, Ildong Pharmaceutical, Lucky, and Geumseong. Samsung Pharmaceutical, Hanil Pharmaceutical, Cheondo and Pharmaceutical… I did so many works.

제가 얘기는 우선 모델한데도 밤에 동침하지 말아라. 같이. 그리고 잠을 푹 자라. 눈이 푹 들어가도 좋으니까 밤에 푹 자라. 그리고 반드시 가능하면 목욕을 하고 와라, 목욕하는데도 아무한테도 얘기도 하지 말고 나와라. 말하게 되면 기가 사라진단 말예요. 말도 하지 말고, 예를 들어서 조금이래도 신경 쓰면 얼굴이 이그러진다. 그 나 자신도 그, 그런 면은 몸조심을 잘하지요. 그건 그래야 참 진(眞), 착할 선(善), 아름다울 미(美)라는 것이 나온다 이겁니다. 그리고 또 소릴 질러요. 잡념을 버리라고. 그래서 이제 그것이 샷타(셔터shutter)를 누른다고 되는 게 아니라 우연히 누르는 도중에 하나님이 도와야 하나 나온다 이거지.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잘 안 나와요. 얼굴이 잘못하면 슬프게 나오고, 광고사진은 마음이 착하고, 그, 좀 무슨, 슬픔이라는 게 나오면 안 되거든. 한국 사람은 잘못 웃으면은 약간 슬픔이 보여요. 나두 뭔가 나가서 딴 소리도 안 하고, 말도 안 하고, 여자도 잘 안 보고, 그리고 마음을 정화시키고서 촬영에 임한다 이겁니다.

I told the models not to make love a night before the shooting. It’s OK to have a puffy face. Have a good sleep. Go to a public bath, but tell nothing to anyone. – It was to keep the energy of models. – So, it was not to lose the energy. So, for example, I told them, “Your face will be twisted if you lose the concentration.” And I was also very careful about myself. Truth, goodness, and beauty can emerge only after one keeps oneself controlled. And I yelled at the models to throw the idle thoughts away. It’s not about me pressing the shutter of a camera. It’s about capturing an image by chance. It is difficult to get a photo that I appreciate. It is also difficult not to get a dispirited face in the photo. Advertisement photography should not carry any sense of grief. Koreans tend to show a little grief when they smile. I didn’t talk to anyone after taking a bath and meet nobody. It was to make my mind and body become pure.

(정주하)
네 (웃음) 그 서울시의 의뢰로 선생님이 항공촬영을 하셨다고 {김: 예.} 하셨잖아요. 그때 서울시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서울시가 넓게 보였을 터인데요. 그때 당시에 서울시 모습을 어떻게 느끼셨어요. 선생님.

(김한용)
그때 한참 발전할라 그럴 무렵이에요. 발전이 완전히 못 하고, 70년 지나서 부터 이제 70년도 올라가기 시작했지. 인제 70년도에 찍은 거는, 사진도 있지만 그건 남산 꼭대기에서 찍어서 그건 알고. 60년대에 찍은 것은 남산에서 찍었으니까 보면 알지. 얼마나 발전했는지. 70년대부터는 급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대한민국이. 건물이 많이 올라가기 시작했지요.

(Jung juha)
The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commissioned you to take aerial photographs of Seoul. You must have seen the vast scenery of the city from above. How did you feel about the city at the time?

(Kim Han yong)
It was around the time when the city started to grow. The city was completely swept away. It was in the early 1970s when it started to come back. I can tell my photos from the 1970s since I took them from Namsan. There are also photos I took from the same spot in the 1960s, which I can also recognize. I see the development of the city in those images. A huge development happened after the 1970s. Many buildings were constructed then.

그때 그 이영준 교수라고, 그 사람 그 스피크를 잘하더구만, 영어를 잘하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내 책자를 봤대, 내가 59년도서부터 84년도까지 광고물 사진 찍은 거를 몽땅 다 그거에 실었어. 한 페이지에 열두 장 들어가는 거, 넉 장 들어가는 거 있고 뭐, 하다못해 인물사진 칠백 장 들어가는 거 있고, 그걸 보게 되면 나를 쫙 읽었지. 거기서 이제 광고사진을 골랐어, 이 사람이. 그래서 오십 석 점을 골랐어요. 그래서 전시를 했는데, 독일에서 의외로 내 방을 하나 차지했지. 방 하나 차지하고, 그 사진이 상당히 환영을 받았다 이거야. 소위 말하는 광고사진, 그전에는 우선 사진을 광고사진을 작품으로 인정을 안 했단 말이야.

그 이영준 씨가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시초로서 광고사진을 일반 사진과 똑같이 동등하게 취급을 해서 사진작품으로써 회화, 조각 같이 전시한 사람이 그 사람이에요. 뭐 어떻게 보면 내가 그 사람의 은인이에요. 그 사람이 김한용이라는 사람을 만들었다구. 또 거기서 책이 있기 때문에 알았지. 내가 그동안에 59년도에서부터 84년도까지 일한 거 당장 실었으니까.

There is a professor Lee Young June. He speaks well in English. He told me that he came to know me by my book of photography. I put all my advertisement photo works from 1959 to 1984. Some pages included12 portrait images, some others included only four images. One page even included 700 portrait photos. One can read me through the book. He then selected images from the book. He chose 53 photos. So I had an exhibition in Seoul. And I was given a separate room in another exhibition in Germany. I was surprisingly well received in overseas. Before that time, advertisement photography was not considered as art.

Lee was the first person in Korea who treated advertisement photography as same as other kinds of photography as well as painting and sculpture to be exhibited as art. He is my benefactor. He is the one who made me as who I am, thanks to the book.

하나 아쉬운 것이 아까도 얘기지만 이게 내 작품이다 자랑할 수도 없는 것이 좀 아쉽고, 그걸 헐라고 해도 이제는 육체가 마음대로 말 안 듣는다 말이여. 과연 내가 지금 100세에 도전하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해서 내가 노후를 장식할까. 그래서 저는 2년 전에 계획한 서울 거리, 서울의 장면을 파노라마로 찍었는데, 그와 동시에 서울시내의 사진을 또 찍어요, 두 가지를. 그렇게 하는 데 몸이 허락하는 한 이제, 계속해서 찍는데, 뭐 욕심 같아선 100살 때 대거, 막대한 돈을 들여서 한번 전람회를 이루는 것이 내 소원이지.

일에 대한 욕심을, 선에 대한 욕심을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이 선의의 목적을 달성할래믄 무단한 노력과, 무단한 인내와, 그걸 이제 양성해야 되겠다 이거지. 훈련을 해야 되겠다 이거지. 노력해야 되겠다 이거지. 노력은 영원히 헛되지 않으리! 이런 각오로써 임하고 있습니다. (웃음)

One thing that I miss is that I don’t have anything that I can claim as my ‘work.’ And I cannot physically do it now even though I want to. That’s why I want to live until I become 100 years old. I think about how I should finalize my last years. Two years ago, I planned to take panoramic images of Seoul and other images of the city at the same time. I’ll do it as long as my body allows me to do so. I want to have an exhibition when I become 100 years old even if it will be difficult to do so. The desire for work is for the sake of goodness, which is truthful, good, and beautiful.

To achieve such desire, infinite effort and patience are needed. One has to train oneself. One has to put an effort. One’s effort will never be consumed in vain! This is the attitude I want to h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