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 LEEUM
인간, 일곱 개의 질문 - [Questions] 최재천 생태학자
2021
Client 리움미술관 LEEUM
Project 인간, 일곱 개의 질문 - [Questions] 최재천 생태학자

리움미술관
인간, 일곱 개의 질문 – “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들’ 인터뷰 시리즈
최재천 (생태학자)
2021

LEEUM
Human, 7 question – “What is Human?”
‘Questions’ Interview series
Choe Jae Chun (Ecologist)
2021

크레딧 보기

기획 | 리움미술관
김태연 책임연구원 (Education and Public Programs)

구성 및 편집 | 57STUDIO

촬영팀| 정재하, 김태우, 양용진
/ 엄준호, 이규연, 강원모

드로잉 : cucurucu

작업 소개

인간전 연계 인터뷰 시리즈의 마지막 영상에서,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인간이 자연을 지나치게 경쟁적 시각으로만 바라보았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최종 승자가 독식하지 않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해결책의 단서는 최재천 교수가 제안하는 새로운 인간의 학명, 호모 심비우스 (Homo Symbious)에 담겨 있습니다.

In the final video of the interview series connected to the Human exhibition, ecologist Professor Choi Jae-cheon highlights that humanity has viewed nature too competitively. He explains that there are ways to survive without the winner-takes-all mentality.

The key to this solution lies in Professor Choi’s proposed new scientific name for humanity, Homo Symbious.

프로젝트 내용

《인간, 일곱 개의 질문》展과 연계한 6개의 인터뷰 시리즈.
인간이란 무엇인지, 코로나 팬데믹과 인류세를 마주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국내외 석학과 참여 작가들에게 묻고 그들의 통찰을 들어본다.

출처 : 리움미술관

이제 저희에게 정말 시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이 뭐 이 정도면, 아직은 뭐’ 저 과학자들이 알아서 다 해 줄 것이고… 어쩌면 아닐지도 모릅니다. 굉장히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진정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성찰의 시간을 이제는 더 미뤄서는 안된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생태학자 최재천

생태학자로서 교수님이 보시는 ‘인간’이란,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인간도 엄연히 생물이고 자연계에서 살아가야 되는 그런 존재고 진화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너무 독특해요. 다른 자연계 생물들에 비해서 굉장히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데 과학적으로만,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생물학적으로만 분석할 수는 없는 것이고요. 우리 인간사회는 인문사회학 분야가 있고 그분들의 평가가 굉장히 중요한 거죠.

To you, as an ecologist,
what do “human” and “human-ness” mean?

Humans are unquestionably organisms, and beings that must live within the natural world. Although we are products of evolution, humans are truly unique. Because we are so unique in comparison to other organisms in the natural world, we are unable to understand ourselves solely through science, or to put it more precisely, to analyze ourselves solely through biology. Human society is also addressed by the human sciences and the evaluations of scholars in that field are very important, too.

최근에 저희 과학계에서도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어요. 굉장히 오랫동안 생물학자의 죄가 좀 큽니다. 제가 생물학자를 대표해서 사죄하는 것 같아서 웃기지만 저희들이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그동안 설명하고 묘사할 때 경쟁은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동안 저희들이 어설프게 분석했던 자연의 모습이 그저 내 주변의 모든 존재들을 다 제거해야만 내가 살아남는 그런 모습인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저희들이 자연에 나와서 관찰을 해보면 그렇게 굉장히 대립적인 모습들이 먼저 눈에 띌 수밖에 없거든요.

Recently, the scientific view of humans has changed dramatically. Biologists have been doing something very bad for a long time. It might sound funny for me to be apologizing on behalf of biologists,but until now, when describing nature, including humans, we’ve analyzed it as something in which you have to eliminate all other beings around you in order to survive yourself. Some competition is inevitable, but we took it too far. Because when we went out to observe nature, the first things that caught our eye were elements of extreme conflict.

그래서 저희들이 경쟁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까 자연이 마치 다윈 선생님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생존투쟁이다’,‘적자생존이다’ 이렇게 마냥 험악한 곳인 줄로만 저희들이 이해를 하고 그런 식으로 사회와 소통을 해 왔거든요.
근데 놀라운 것은요 지난 한 20년을 보면 한 20년 정도를 저는 보는데 생물학자들이 더 세심하게 자연 생물들의 관계를 들여다보다 보니까 경쟁은 불가피한데 그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엄청나게 다양하더라는 거예요.

So we placed too much emphasis on competition, and, as a result, we understood nature as a place of great harshness, where, to use Darwin’s terms, there was “a struggle for survival” resulting in the “survival of the fittest.” And that was how we communicated with society. But the surprising thing is thatover the last 20 year – about 20 years in my view, that is -biologists have looked in more detail at the relationships between natural organisms and found that although competition is inevitable, there is a huge variety of ways to survive amid the competition.

물론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힘을 가지고 주변을 제거하면서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방법도 물론 가능합니다. 그런데 자연계를 두루두루 세심하게 둘러보니까 그런 존재보다는 서로 도우면서 손잡고 미쳐 손잡지 않은 자들에게 약간의 경쟁적 우위를 점하면서 살아남는 완벽하게 남을 제압하면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살아남는 게 중요한 것이거든요. ‘적자생존’ 이것이 굉장히 유명한 다윈의 이론을 표현하는 사자성어가 돼버렸잖아요. 그런데 그것의 영어표현이 ‘survival of the fittest’ 예요.

Of course, it’s possible to survive alone and stay well fed by being immensely strong and eliminating everything around you. But when you look around the natural world in detail you see that it’s more important to team up with other organisms and to gain a slight competitive edge over those who haven’t collaborated with each other, rather than completely suppressing others and dominating them. “Survival of the fittest.” That’s become a very famous phrase, expressing one of Darwin’s theories.

그러면 최상급을 쓴 것이에요. 최상급은 최고로 잘난 누구 하나를 우리가 보는 것이잖아요. 그것은 원래 다윈 선생님이 만드신 표현이 아니었어요. 다윈의 이론에 흥분해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다윈 전도사를 자처했던 허버트 스펜서가 쓰던 표현인데 그것을 다윈과 함께 자연선택 이론을 발견해낸 윌리스가 옆에서 다윈선생님에게 계속 말씀을 드린 거에요. ‘선생님, 저 표현이 참 좋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가져다 쓰시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는 바람에 어느 날 다윈 선생님이 그 표현을 가져다 쓰시기 시작한 거에요. 저는 몇 년 전에 『다윈 지능』이라는 책을 쓰면서 제 주제에 다윈 선생님한테 한번 덤볐습니다. 그 책에서, ‘선생님. 실수하셨어요.’ 그 표현을 가져 오는 것은 좋으셨는데 ‘survival of the fittest’ 가 아니라 ‘survival of the fitter’ 하고 비교급으로 그 표현을 바꾸셨더라면 선생님의 이론을 설명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It’s a superlative expression. We see it as meaning someone at the very highest level. But the phrase wasn’t originally coined by Darwin. It came from Herbert Spencer, a man who got very fired up by Darwin’s theories and became a self-appointed evangelist for them. Wallace, who discovered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 together with Darwin, kept on trying to persuade Darwin that “survival of the fittest” was a great expression, and that Darwin himself should start using it. In the end, Darwin did begin using the expression himself. A few years ago I wrote a book called Darwinian Intelligence. In it, I argued with Darwin on my subject. I told him, “Mr. Darwin, you made a mistake.” It’s fine that you started using that expression, but we would have had no problem explaining your theory if you had changed your superlative to a comparative: “survival of the fitter” instead of “survival of the fittest.”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철저하게 ‘상대성 이론’이거든요 제가 분석하기에는, 세월이 좋으면 자원이 풍부하면 아무도 도태되지 않습니다. 다 잘 먹고 잘 삽니다. 근데 세월이 어려워지면 자원이 부족해지면 가장 적응을 잘 한 한 마리만 살아 남는 게 아니라 저 밑에서 제일 끝에서 적응 못한 일부가 사라지고 대부분은 그냥 살아남는 거거든요. 근데 그동안 우리가 최상급을 자꾸 쓰다 보니까 1등만 존재하는 세상처럼 이해하고 반드시 남의 위에 있어야, 아주 세상의 정점에 있어야만 살아남는 줄 알고 지나친 경쟁을 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근데 만일 이걸 비교급으로 이해하시면 서로 손잡고 그냥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자. 그러다가 정말 운 나쁜 저 끝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고요. 대부분의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거든요.

Darwin’s theory of natural selection is without question a theory of relativity. In my analysis, in good times, when resources are plentiful,
no one is eliminated through natural selection. Everyone keeps eating and survives. But when hard times come, and resources are scarce, it’s not only the single fittest organism that survives. The majority of organisms do survive, while only a few of the least well-adapted die out. But because we’ve used this superlative expression for so long, we’ve come to understand the world as a place where only those in first place survive. We’ve been much too competitive, believing that we can only survive by being above everyone else, at the very top. If you understand this in comparative terms, whereby we collaborate and decide to survive in any way possible, it’s only the very unluckiest, those at the very bottom, who end up being eliminated. Most of us survive.

그래서 저는 오래 전에 우리 인간을 표현하는 학명이 ‘호모 사피엔스’잖아요. 사피엔스라는 말이 이제는 책 제목으로 나오고 거의 교양 수준으로 인간의 학명을 모르는 분이 없어졌는데 저는 오래 전부터 사피엔스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왜냐하면 그것은 영어로 얘기하면 wise라는 뜻이거든요. ‘현명하다’ 우리 손재주가 좀 있다 그래서 ‘호모 하빌리스’가 있었고요. 두 발로 제대로 일어섰다 그래서 ‘호모 에렉투스’도 있었고 ‘네안데르탈인’도 있고 많았거든요. 그런데 다 사라지고 딱 한 종이 지금 지구에 남은 것이에요. 그러더니 그 종은 자기가 자기를 가리켜서 현명한 인간이다 이렇게 부르는 것이에요. 저는 동의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 현명 했으면 우리의 집을 이렇게 지금 무차별적으로 부수면서 살아야 되나. 공기도 망가뜨리고 물도 더럽히고 이러면서 콜록거리면서 이게 현명한 동물이 할 짓인가, 저는 동의 못하거든요. 20여 년 전에 제가 우리 인간의 학명을 새롭게 제안을 했었어요 학계에다가, 그게 ’호모 심비우스’ 인데요. 그러면서 몇 년 전에는 제가 『손잡지 않고 살아 남은 생명은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요. 제가 쓴 책의 제목 중에 제일 사랑하는 제목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 제목이 지금 가장 그 절묘한 제목이 된 것이에요.

The scientific name for humans today is Homo sapiens. There’s now a well-known book titled Sapiens, and almost everyone knows our scientific name as a matter of basic learning. But I’ve disliked the term sapiens for a long time. Because it means “wise.” When our ancestors got more adept at using their hands we labeled them Homo habilis, meaning “handy man.” Then, when they started walking on two feet, we called them Homo erectus. And there were Neanderthals, and various other types. But all of those disappeared and there’s now only one type of human left on earth. And that type has labeled itself the “wise” human. That’s what we call ourselves. I can’t agree with that. If we were really so wise, would we be trashing our own home like this? Would we be coughing and spluttering as we pollute our own air and water? Are these the actions of a wise animal? I can’t agree. About 20 years ago, I proposed to the academic community
a new scientific name for us as humans: Homo simbious. And a few years ago, I wrote a book titled No Organism has Survived without Collaborating. It’s my favorite title among all the books I’ve written. Somehow, that title has now become my most outstanding one.

남과 손잡는다는 것이 이렇게 막강한 힘이 될 줄은 우리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 그것을 우리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어쩌면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우리가 그동안 착각했던 것 같아요. 사실은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아니었거든요.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실제로 우리가 자연을 정복하고 되게 풍요로운 삶을 지금 살고 있는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걸 타임스케일로 한번 보시면요.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한 지 기껏 해봐야, 길게 봐도 한 300년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우리가 지구에 탄생한 것이 한 25만 년 전인데요. 25만 년도 지구 역사를 놓고 보면 순간인데 25만 년 중에서 거들먹거리고 산 것은 300년 밖에 안 됩니다. 저는 우리의 ‘인간다움’이 잠시 착각 속에 빠졌었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을 발휘하고 뭔가 미래를 막 우리 뜻대로 창조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묘사해 왔는데 사실은 이번에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시면서 그런 것을 다 느끼셨겠지만 우리의 존재가 그렇게 막강한 것이 아니었구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한테 지금 500만 명이 죽어 나갔거든요. 어쩌면 앞으로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인간다움은 겸허한 그래서 다시 자연과 함께 가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그런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저 혼자 괜히 부르짖는 게 아니라 저는 그런 걸 요즘 관찰하고 있거든요 굉장히 많은 분들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새롭게 맞이할 새로운 시대에 우리의 인간다움은 ‘호모 사피엔스’ 라기보다는 제가 한 20년 전부터 주장해온‘호모 심비우스’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 해봅니다.

Earlier, we had no way of knowing that collaborating with others would become such a powerful force. Now, we have begun to realize it. What I’m trying to say is: We may have been deluding ourselves until now about the meaning of “human-ness.” We weren’t actuallthe masters of creation. We came to believe that we could conquer nature, and we have indeed conquered it, and we now live lives of considerable abundance. But just stop and think for a second. In terms of timescale, we have only been living like this for about 300 years at the very most. We first appeared on earth about 250,000 years ago. In terms of the history of Earth, that’s just the blink of an eye. And we’ve only become this arrogant in the last 300 years. I think our “human-ness” has sunk into temporary delusion. We’ve been depicting ourselves as beings who hold and exercise immense power and who can create the future exactly as we like. I’m sure this is a thought that many of you will have had during the current COVID-19 pandemic: We aren’t such powerful beings after all. Five million people have now died from a virus we can’t even see. Perhaps the new human-ness in the post-COVID era will be one of humility, in which we decide to live together with nature again. I’m not just making this up out of nowhere: it’s something I’ve observed recently. I can feel that thoughts like this are blossoming in the minds of a great many people. I think the new era that awaits us will be one in which our human-ness is less Homo sapiens and more Homo simbious, as I’ve been arguing for the past 20 years or so.

인간이 지금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일까요?

제가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려본 것처럼 최근에 종종하는 강연의 제목 ‘인간, 너는 누구냐.’ 제가 ‘인간,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너는 누구냐’ 라고, ‘나’가 아니라 ‘너’라고 했거든요. 그건 제 나름대로 객관화를 해보려고조금 생각해 본 관점인데요. 우리는 어쩌면 그동안 너무 우리 중심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 중심적으로 행동하고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근데 이번에 코로나를 겪으면서 세계에서 원래 그런 재앙들이라는 것은 예전에는 정말 제 3세계에서 가난한 나라에서 벌어지고 부자나라 선진국들은 뉴스에서 이렇게 들으면서 ‘야, 거참 안 됐다, 원조 좀 해줘라’ 그리고 시간이 좀 있으신 분들은 가서 봉사활동도 좀 하고 그랬거든요. 근데 지금 재앙의 판도가 바뀌고 있어요. 이번에 제일 크게 당한 나라가 어디입니까? 미국이에요. 세계 제일의 나라라는 미국이 제일 심하게 당했고 유럽이 심하게 당했고 선진국들이 당한 겁니다.

What is the most important question humans must ask themselves today?

As I said before, a lot of my recent lectures have been titled “Human, who are you?” Rather than call them “Human, who am I?”, I deliberately used “who are you?”. In my own way, I was trying to adopt a more objective viewpoint. Perhaps, until now, we’ve seen the world from too anthropocentric a perspective, acting and living in a self-centered way. But the COVID-19 pandemic we’re experiencing now is like the kind of disaster we used to think could only happen in poor countries – in the Third World. Rich developed countries would hear about them on the news and think, “That’s so sad. Let’s send them some aid.” Those of us who had the time might go and volunteer there for a bit. But now the domain of disasters is shifting. What’s the worst-hit country this time? The United States. The US, known as the world’s “number one country,” has taken the biggest blow, and Europe has suffered badly too. Developed countries have been hit.

기억하시는 분 계실 텐데 2020년 작년 여름에 우리 역사상 최장 장마를 겪었어요. 54일 동안 비가 쏟아졌습니다. 물이 잠겼어요.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남의 나라의 얘기가 아니고요.
먼 곳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얘기라는 겁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동안은 그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왔었거든요.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아주 쉽게 표현하면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이겁니다. 우리가 지금 자연으로부터 누리고 있는 이 혜택을 우리 후손도 누려야 하는 게 아니냐 그래서 우리가 조신하게 살면서 자연을 너무 많이 망가뜨리지 말고 가능하면 복원시켜서 후손에게 물려주자 전혀 안 먹혔습니다. 왠지 아세요? 내가 얼굴도 못 볼 후손을 위해 그런 일을 한다고 그냥 입으로만. 우리가 한참 떠들었지 실제로는 실천이 거의 안 되는 일이었어요. 무슨 얘기를 제가 지금 드리고 있느냐 먼 훗날 우리가 얼굴도 보지 못할 우리 후손에게 벌어질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이 돼버렸다는 겁니다. 재앙의 판도가 바뀌고 있거든요.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먼 훗날,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벌어질 일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점에 벌어지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거죠.

As many of you will remember, Korea had its longest-ever monsoon last year, in the summer of 2020. It poured with rain for 54 days. There were floods. That’s not the story of another country, or some far-flung place. It’s our own story. Until now, we’ve spent a lot of time talking about the concept of sustainability. In the simplest, starkest terms this is what sustainability means: Shouldn’t our descendants also be able to enjoy the benefits we now enjoy from nature? So let’s live with modesty and caution, not destroying nature too much and, if possible, restoring it so that we can hand it on to our descendants. That concept has gained no traction whatsoever. You know why? All we’ve done is blabber on about how we’ll do this for descendants that we’ll never set eyes upon. Hardly anyone has actually put it into practice. What I’m trying to say is that this is no longer something that will happen far in the future to descendants we’ll never meet. It’s become something that is happening now, to us. The scope of disasters is shifting. They’re not happening in other countries: They’re happening in our country. They’re not something that will happen years later, when we’re dead. They’ve become things that are happening now, in our lifetimes.

진정 우리 호모 사피엔스를 지구 표면에서 깡그리 쓸어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앙이 지금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진정으로 우리가 이 지구에서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되나 이제는 이런 것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됐다고 저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요. 이제 저희에게 정말 시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이 뭐 이 정도면, 아직은 뭐’ 그리고 저 과학자들이 알아서 다 해 줄 것이고 어쩌면 아닐지도 모릅니다. 굉장히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진정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성찰의 시간을 이제는 더 미뤄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A huge disaster that can sweep Homo sapiens off the face of the earth is now truly drawing closer, step by step. What I want to say is this: It’s time for us to think very seriously about what kind of beings we are, living here on Earth; about what we can do; and about where we have to start if we are to achieve these things. We really may have run out of time already. But people are still saying, “Well, it’s not so bad yet.” “The scientists will sort it out for us.” I think they may be wrong. We may now be very close to disaster. My message is that we can no longer put off taking the time to reflect upon who we really 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