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SeMA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 주변인 인터뷰 : 김해민
2020
Client 서울시립미술관 SeMA
Project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 주변인 인터뷰 : 김해민

MA-03-00007173, 1987년 노이어베르크섬에서의 <이슬 받아 마시기> 사진. 61X90 cm

서울시립미술관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주변인 인터뷰 : 이수경 (미술가)
2020.8.19 – 12.31

Seoul Museum of Art
Rise Up Rim Dong Sik
Interview : Yeesookyung (Artist)
2020.8.19 – 12.31

크레딧 보기

제작 : 서울시문화본부, 서울시립미술관, 57STUDIO
PD : 서울시문화본부 김호정, 송고운

연출 : 이미지
촬영/조명 : 정원우, 정재하
음향 : 양용진
사운드 감독 : 더백스 스튜디오 백종성
믹싱/마스터링 : 서정혁, 백종성
피아노/Synth : 김세종
기타 : 서정혁
보이스믹싱/fx 레코딩 : 김혜진
편집/색보정 : 이미지
영문 번역 : 전효경
영문 감수 : 앤디 세인트루이스
녹취/자막 : 박지호, 안재영, 오유찬

작업 소개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전시는 커미션 작품 영상, 작가 인터뷰, 전시 설치 영상 등 전시 전반을 담은 영상 콘텐츠를 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주변인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임동식과 함께 작업한 동료인 김학량 작가, 김해민 미디어아티스트, 이수경 미술가, 이성원 교사가 임동식과의 작업 경험을 추억하며, 그들이 바라본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망합니다.

Rise Up, Rim Dong-sik exhibition project produced various video content, including commissioned work videos, artist interviews, and installation documentation. The Periphery interview series features Lim Dong-sik’s collaborators—artist Kim Hak-ryang, media artist Kim Hae-min, artist Lee Soo-kyung, and teacher Lee Sung-won. They reflect on their experiences working with Lim and provide a deeper understanding of his artistic vision and work.

서울시립미술관은 2020년 8월 19일부터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展을 서소문 본관 1층 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일어나 올라가 임동식》 展은 순수 자연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바탕으로 예술 세계를 펼쳐온 한국 자연 미술가 임동식(1945~)의 개인전이다. 2018년부터 임동식은 4차에 걸쳐 서울시립 미술 아카이브(2021년 12월 개관 예정)를 위해 서울시 문화본부에 본인의 예술기록 자원을 기증한 바 있다. 이에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시 문화본부는 협업을 통해 197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작가의 예술기록 자원을 전시로 풀어내어, 자연, 삶, 예술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평생 끈질긴 퍼포머이자 꼼꼼한 아키비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 온 작가를 재평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번 전시는 아카이브와 관련된 본격적인 연구의 첫발을 내딛는 동시에 자연에 쉼 없이 열정적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다성적 짜임새를 지닌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 임동식의 방식을 통합적으로 목도할 기회가 될 것이다. 더불어 이와 같은 시도가 사유 예술가로 불리길 희망하는 임동식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로 이어지고, 향후 서울시립 미술 아카이브에서 전개될 프로젝트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전시소개글

Installation View


<주변인 인터뷰: 김해민>, 2020, 싱글채널비디오, 11분 26초, 57스튜디오
Lim Dong-sik Periphery Interview: Kim Hae-min (Media Artist), 2020, Single channel video, 11min 26sec. by 57STUDIO

Commissioned Work


* 이 영상은 57STUDIO 웹사이트 내에서만 재생 가능합니다.
* This video can only be played on the 57STUDIO website.

김해민 (미디어아티스트)

Kim Hae-min (Media Artist)

(1980년대) 그 당시에는 몰랐어요, 임동식 선생님을 내가 비디오를 하고 있던 시절에는 난 대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때 아마 임동식 선생님께서는 독일에 계셨을 거예요. 그 시간차가 그때하고 좀 나요. 그 시절에 임동식 선생님께서 대전에 있는 대전문화원의 전시 차 독일에서 지원금을 받고 와서 전시를 했고 그 전시 하는 데 내가 조금 도움을 줬던 걸로 기억이 나요. 그때 와서 봤던 임동식 선생님의 첫 인상은 약간, 뭐라 그럴까 항상 이렇게 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매를 가졌고 그러한 포즈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전시가 끝나고 임동식 선생님은 다시 독일로 갔고 1991년도 봄인가 확실히 기억은 안 나는데 제 작업실로 방문하셨어요. 그러면서 처음 하시는 말씀이 뭐냐면, “아직까지 계속 비디오 작업을 하시나유?” 이런 말투로 물어보셨다고. 그 문장이 지금도 기억에 좀 나요. 《금강에서의 국제 자연 미술전》에 참여를 하게 되면서 여러 얘기를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아주 좀 가깝게 지내게 됐어요.

당시 ‘야투’라고 하는 데에 참여를 하게 되면서 ‘야투’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던 거죠. 그러면서 자연미술, 대지미술을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그 때 이런저런 작업을 같이 하게 됐었죠. 그때 임동식 선생님께서 그 준비를 하면서 내가 보는 임동식 선생님은 어떤 프로젝트가 있으면 그 프로젝트에 올인을 해요. 그러니까 그 외에 일반 사람들이 사는 문제에서 애가 있다면 애가 대학교를 가고 아내가 어떻고, 집안이 어떻고 하는 이런 문제 일체를 그 프레임에서 두부 모 자르듯이 그 나머지는 다 없애요. 그리고 눈만 뜨면 그 작업에 올인을 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나머지 후배 작가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그렇게 다 올인을 안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지점에서 갈등들이 가끔 생기고 이랬던 기억이 나요. 그 행사가 그 시기에는 생각 외로 우리나라에서 아마 제일 큰 국제 행사였을 거예요. 그리고 임동식 선생님이 갖고 있었던 선호하는 것 어떤 로컬에 대한 것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문화에 대한 것들 이런 것들에 굉장히 안타까워했던 기질이 있었다고 그래서 사투리도 의도적으로 좀 더 공주 사투리를 안 잊어버리려고 쓰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그 행사를 어쨌든 진짜 가난하게 치른 거죠. 그렇지만 독일의 작가들은 대단히 유명한 작가들이 왔었어요. 독일에서 지원금을 받아서 공주의 조그만 동네에 와서 군부대에서 지원한 텐트 속에서 자면서 작업을 한 거죠. 이상한 한국 된장국 먹어가면서 거기서 안 맞아서 설사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었고 그리고 일본 쪽 작가들은 제가 불렀어요. 그 당시에 제가 퍼포먼스 때문에 일본에 갔다가 교류를 자주 했을 때였는데 그때 한 여섯 분인가 다섯 분이 왔었어요. 그래서 어쨌든 구색 맞추는 데 한 나라가 아닌 여러 나라가 됐었고 굉장히 활성화 됐었죠. 전국적으로 주목을 많이 받았어요. 단, 서울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하지 않았죠. 왜냐면 우리나라는 서울 아닌 모든 거는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고 아마 지금도 대체로 그럴 거예요.

사실은 우리나라가 그런 식으로 한 번도 변방을 못 쳐다본 거죠. 변방이란 단어도 이상한 거죠. 임동식 선생님은 항상 변방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굉장히 싫어했었어요. “공주 중심에서, 서울 변방과” 이런 식의 얘기들을 즐겨 했고 소위 말해서 죽하고 나물 먹지만 우리끼리 배불리 재미있게 먹으면 이것도 행복한 게 아닌가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고 지독하게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했던 거죠. 처음 야투에 그렇게 참여해서 야외 미술전에 같이 나갔을 때 그 당시 임동식 선생님과 같이 나갔는데 나는 미디어아트 쪽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물살이라든지 변화하고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촬영도 하고 그랬었는데 그때 임동식 선생님 작업 중에 이런 게 하나 있었어요. 어떤 거였냐면 조그만 물가에서 물가나 연못 가장자리에 물이 좀 빠지고 나오고 하면서 그 가장자리 흙에 이렇게 라인이 생기잖아요. 물이 좀 줄어들면 라인이 생기는데 그 라인에다 이렇게 높은음자리표를 해놓더라고 그러니까 그 라인이 악보의 형태로 이렇게 바꿔서 인식되는 거죠. 사운드는 아니지만 소리가 나는 무엇으로 높은음자리표 하나로 그렇게 보여주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이런 감각들도 굉장히 들어가는구나 여기에서’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원골과 마을》, 이런 행사가 끝나고 난 다음에 그 가을, 겨울에 들어가면 나름대로 임동식 선생님한테는 혹독한 어떤 계절을 보내는 시기였어요. 어쨌든 그렇게 익숙해져서 잘 보냈고 그때부터 조그마한 소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본춘이와화가아저씨 – 사계〉인데 굉장히 나는 그걸 좋게 봤었어요. 나는 개인적으로 파랑새는 저 무지개 끝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집 처마 밑에 있다는 그런 논리를 좋아해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임동식 선생님의 작업이 자기 주위에서 주어진 조건이 그렇고 궁상맞고 썰렁한 이런 을씨년스러운 계절에서 동네 아이를 하나 놓고 일 년이지만 이렇게 커 가는 느낌들, 자기하고 이런 발상들이 아주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하고는 접점이 있었고 그리고 독일에서 미디어아트 경험도 있으셨고 그래서 미디어아트 세계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고 그래서 그런 얘기들을 내가 물어보면 많이 얘기를 했었던 거였고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퍼포먼스 미디어 작업을 하다가 설치 작업을 하게 됐는데 그 때 공주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제》때 초대 작가로 설치 작업을 했었어요. 그게 나한테는 나름대로 다른 작업으로 가는 터닝포인트가 됐던 거죠. <망치>라는 제 작업이 하나 있는데 그 작업은 1989년도인데 사실은 1990년도, 이 때 그런 아이디어에 대해서 한번 여쭤봤었죠. 좋은 작업 될 거라고 한번 해 보시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항상 선생님하고 많이 얘기를 했었죠.

그러니까 나한테는 좋은 동료로서도 존재했었고 또 전반적으로 어떤 선생님으로서 그래서 개념이라든가 나름대로 이런 것들도 훌륭하게 저한테 조언도 해 주셨고 그리고 임동식 선생님 같은 경우는 거시적으로 문화운동가적인 기질이 좀 있었어요 일반적으로 숲을 보는 영역이 좀 있었지 작가들처럼 디테일, 나무의 부분만 이렇게 보지 않았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작품을 하는 사람들 그 당시에 함부르크라든가 그런 곳에서 국제전을 할 때 보면 주변의 작가나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진 작가들이라든가 활동을 잘 하는 작가들 이런 사람들을 추천 받아서 같이 그룹전, 국제전에 나가는 게 통상인데 임동식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고 자기하고 함께 했던 공주 지역 출신의 주말마다 같이 작업을 하러 나갔던 작가들을 순수하다고 보고 그들과 같이 작업을 계속했고 그들의 작품들을 독일에 가서 전시도 하고 또 좋은 반응도 얻고 그랬었죠. 지금에 와서 옛날에 야투든, 자연미술이든, 대지미술이든 간에 그러니까 사실은 중심에서 눈에 띄느냐 안 띄느냐의 문제가 이미 미술계에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로 극명하게 나타나는 데가 사실은 한국이었고, 그만큼 로컬이 없었던 나라였죠. 그 로컬의 영역에 애정을 갖고 작업을 한다고 나름대로 지키고자 하고 임동식 선생님 표현을 빌리자면 서양미술은 그 자들의 어떤 것으로서 이에 대한 비판적인 대안으로서 작업을 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생각이 많아가지고, 항상 즐거운 생각이 아니겠죠. 돈도 궁핍하고 혼자고 어느 날 기름값이 없어서 불을 못 떼고 이런 시절들이 있었으니까 내가 촬영했던 시절이 그랬었어요. 그런 시절이었을 때에 내가 볼 때는 우리가 맛있는 밥을 이렇게 먹다가 우연히 갑자기 생각지 않은 쓴 맛이 딱 씹힐 때가 있잖아요. 우리가 맛있는 고깃국을 먹었는데 이상하게 생각지 않은 쓴 맛이 있을 때의 표정 약간 “크-” 이런 표정 이것이 가끔 생각나죠. 그렇게 임동식 선생님은 자기가 좋게 생각하고 나가다가도 한 번씩 그 시점에 어떤 트라우마처럼 불가항력 같은 것들을 느끼시는 거지. ’아, 지금 내가 이 짓을 하고 살아야 돼, 말아야 돼.’ 이런 거죠. 작가라는 사람들 다 그래요. 임동식 선생님처럼 아침부터 잠자기 전까지 조그만 작업실에서 거의 외부와 소통이라고 하는 건 어쩌다 나를 만나는 정도. 또 홍명섭 선생님. 그렇게 가깝게 유근영 선생님 이런 정도의 가까운 친구 나한텐 다 선생님들이지만 그렇게 만나서 얘기들 하고 지내는 게 전부였다고요. 지금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고요.

지금은 뭔가에 쫓기니까 작품에 대해서, 그림에 대해서 그림이 또 세세하게 이렇게 서양에서처럼 쉽게 감각적인 측면으로 작업을 여러 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필로 아주 정성 들이듯이 특히 내가 볼 때는 무늬목 그릴 때 그 무늬목을 나도 옛날에 그림을 해 볼 때 한 번 그려봐서 아는데 어떤 능숙한 실력도 필요하지만 농담, 조금 누르느냐 안 누르느냐에 따라서 덧칠을 하면 안 되는 상태에서는 바로 무늬목이 사라지더라고 그래서 그런 거를 그리는 미세한 경지 같은 것 그런 것들을 대단하게 느꼈고 그리고 화폭 속에서도 항상 풀 한 포기라도, 프레임 귀퉁이에 있는 풀 한 포기라도 정성 들여서 다 그렸죠. 그게 나름대로 그렇게 그릴 의지로 하는 건진 몰라도 소위 말하는 몸에 배인 어떤 것 그러니까 중요하지 않아도 자기는 중요하게 그리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사실은 굉장히 긴 시간을 그리는 거예요. 그리고 탁월한 재능이 있어요, 그리는 데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서 지금 여기까지 와서 전시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단 하나, 지금 문제보다도 이 전시가 끝난 이후에 예를 들어서 한국미술이 좀 더 스스로를 되돌아볼 때쯤 되면 그때쯤 되돌아보는 시기가 됐을 때 임동식이라는 작가의 모습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I didn’t know Mr. Rim Dong Sik back then (in the 1980s). When I was doing video art, I lived in Daejeon. I believe Mr. Rim lived in Germany then. We had time differences. Mr. Rim came from Germany to Daejeon to do a show at Daejeon Cultural Center with a grant from Germany. I remember helping him with his exhibition. The first impression I had about him was… How should I put it? He had the eyes of a ponderer and the poses of it too. After the exhibition, Mr. Rim went back to Germany. I can’t remember exactly when, but maybe it was in the Spring of 1991. He visited my studio. The first thing he told me was “Are you still doing video arts?” That was how he spoke. I still remember that question. We got to talk more as we participated in the International Nature Art Exhibition of Geumgang. Since then, we have stayed very close.

I had a chance to participate in Yatoo, and therefore, I got to understand what it is a little. That was my first time to experience nature art and land art. We made some artworks together then. When Mr. Rim prepared the works, In my opinion, he gives his all in when there’s a project. In other words, regarding other issues in our daily lives, such as kids going to college or wife doing this or that, family doing what, he disregards them as if he chopping tofu with a knife. Then he dives into the project as soon as he wakes up. Then the artist after him or others don’t do their best. I remember there had been conflicts because of that. Surprisingly, I think the event was the biggest international event held in Korea at the time. It channeled what Mr. Rim preferred, such as things that were local and culture that was disappearing. He tended to feel very sad about it. I thought he deliberately spoke Gongju dialect in order not to forget it. That’s what I thought. He held the event with a really tight budget, but very well-known German artists came. With the grant from Germany they came to a small town in Gongju, slept in the tents provided by military troops to make art while eating strange Korean doenjang soup. Many had diarrheas because they were not used to Korean food. I was the one who invited the Japanese artists. I was well-connected with them because I visited Japan often for a performance. I believe six or five artists came. There was more than one country to suit the name of the event. It was very actively participated and gained nation-wide attention. However, Seoul didn’t pay much attention. Because back then, our country only cared about what was happening in Seoul, and I believe it’s still mostly the case today.

Actually, our country didn’t have a chance to look at the remote areas. The word “remote areas” is strange. Mr. Rim hated the term when it was brought up. He used to say “at the heart of Gonju and Seoul, the remote area.” “Even though we only had rice porridge if we had a good, fun time wouldn’t you call that happiness?” That’s what he thought. He felt sorry for the things that are disappearing so much. When I join a group of Yatoo for the first time, I participated in Outdoor Field Art shows with Mr. Rim at that time. Because I did media art, what I could do was filming. I was interested in things that change and move such as the current of water. Mr. Rim did a piece at that time, which took place in a small waterside. When the water at the edge of the waterside or pond comes and goes, it leaves lines on the soil. When the water retreats, it makes lines, and Rim draw a G clef on that lines. Now the lines are part of a score. It’s recognized differently. It is not a sound, but it becomes something with sounds. He transferred it with just with a G clef. I was shocked. I thought, ‘You can apply this kind of sentiment here’. For example, when Art and Village was over, and when the fall and winter began, it was a tough season for Mr. Rim. He got used to it and spent it well.

Since then, to pasttime, I remember him starting to paint. He painted Bonchuni and the Painter- Four Seasons, which I loved. Personally, I like the logic that you can find a bluebird not at the end of the rainbow, but under the eaves of one’s house. I liked how Rim’s works in that perspective that although he was in a miserable, cold, dreary season, he painted a kid from the town growing over the year with him. I thought it was a great idea. His work of art crossed paths with mine, because he had experiences in media arts in Germany. He knew well about the field of media art. That’s why we had many conversations when I asked him about it. I heard many stories about the media art scene in Germany. I transferred from doing performance media arts to installations. I did installations when I was invited to The International Nature Art Exhibition of Geumgang. That was a turning point for me to change paths. I had a work titled TV Hammer. It was in 1989. In 1990, I asked Mr. Rim about what he thought about the idea. He said it’d be a good piece that I should try it. I always talked to him a lot about the art-making process. He has been a great colleague to me.

Generally, as a teacher, he gave me great pieces of advice on concepts and others. Macroscopically, Rim Dong Sik had a sense of a cultural activist. He tended to see the forest, not the details and parts of the trees like the other artists. Most importantly, when people participated in international exhibitions in Hamburg and other places, they usually got recommendations of close artists, nationally well-known artists, or prolific artists to do group shows or international shows together. But Mr. Rim was different. He considered those artists from Gongju who came to make art with him every weekend innocent and continued to work with them. He exhibited their works in Germany and received excellent reviews. Now, it doesn’t matter if you did Yatoo, nature art, or land art. Whether you were noticed by the mainstream and whether it already existed in the field of art became an extreme divider in Korea, which means we didn’t have local arts. With love toward the local arts, he tried to preserve it in his ways. According to his own words, Mr. Rim created art as a critique and an alternative against Western arts created by and for “them.” He had lots in his mind, and not all of them were always joyful. There wasn’t enough money, and he was also alone. On some days, he couldn’t warm up his studio because he didn’t have money for gas. He spent hard time when I filmed him. In my opinion, times like that are similar to the time when you are having a delicious meal, and taste a sudden bitterness out of nowhere. We were enjoying a tasty meat soup, and something tasted unexpectedly bitter. That facial expression. Something like this. I remember those times sometimes. Similarly, Mr. Rim thinks positively about the situation, but once in a while, like a trauma, he feels the irresistible force. Something like, ‘Should I continue doing this thing?’ Every artist feels the same. Mr. Rim Dong Sik spent all day from the morning till night in a small studio communicating without the outside world, except a few occasional visits from me or Hong Myung-seop or other close friends like Yoo Keun Young. They are all seniors to me. We met up and talked, and that was about it. I think it’s still the case.

He is chased by something about the work and painting, and he paints meticulously, even though he has the sense to make many pieces in easily like many other artists. He uses fine brushes and exerts himself to the utmost. It shows especially well when he paints veneers. I know it because I painted veneers myself before. It not only requires skillful techniques, but also depending on shading, how hard you press the brushes the veneers disappear when the paint isn’t properly reapplied. I found it amazing that he had reached the fine state. He always did his best to paint even a blade of grass on the corner of the canvas. I don’t know if he does that deliberately, but it has become his so-called second nature. Even if it wasn’t important, he treated it important when painting. That’s why he paints for a long time. He also has talents in painting. In the end, that is the reason he has a show now at this place. Only one problem remains. When this exhibition is over, when the Korean art scene is ready to look back at itself, I think people will have a more clear view on the artist Rim Dong Sik.

1981년 여름의 기억, 2005, 캔버스에 유채, 182x227 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