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MMCA
✍️ 젊은모색2019: 액체, 유리, 바다 | 최하늘
2019
Client 국립현대미술관 MMCA
Project ✍️ 젊은모색2019: 액체, 유리, 바다 | 최하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젊은모색2019: 액체 유리 바다

학예연구사 | 최희승
참여작가 | 김지영, 송민정, 안성석, 윤두현, 이은새, 장서영, 정희민, 최하늘, 황수연
2019.6.20. – 9.15.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Gwacheon)
Young Korean Artists2019: Liquid, Glass, Sea

Curator | Choi Heeseung
Artist | Keem Jiyoung, Song Min Jung, Ahn Sungseok, Yoon Doohyun, Lee Eunsae, Chang Seo Young, Chung Heemin, Choi Haneyl, Hwang Sueyon
2019.6.20. – 9.15.

작업 소개

최하늘 작가의 작업실(금천예술공장)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가의 작업 모습과 전시장 내 설치 풍경을 함께 담았다.

최하늘 작가는 스스로 ‘조각가’라고 부르는 작가입니다. 조각이라는 큰 주제가 작가에게 굉장히 중요하고 최하늘 작가는 자신이 가진 다양한 주제를 조각이라는 입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초국가적>이라고 하는 시리즈로 구성된 8작품과 10개의 작품을 보실 수가 있는데요. 서울의 풍경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어떤 도시들 그리고 거기에서 계속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어떤 분위기와 사회의 시류 같은 것들을 최하늘 작가는 낯설면서도 속도감 있고 변화무쌍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 최희승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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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

감독: 이미지
촬영: 엄준호, 정원우, 이규연
촬영팀: 강원모, 나영서, 이규빈, 정희영
편집/D.I: 이미지
미디어 설치 코딩: 안재영
사진 : 홍진훤

《젊은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프로그램인 ‘젊은모색’의 19번째 전시이다. 1981년 《청년작가》전으로 출발한 《젊은모색》전은 한국 신진 작가들의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 세계를 조명하며, 국내 동시대 미술의 경향과 잠재력을 예견해보고자 마련되었다. 이번 《젊은모색 2019》전은 미술관 학예사들의 조사, 연구 및 추천과 다수의 회의를 통해 주목할 만한 신진 작가 9명 김지영, 송민정, 안성석, 윤두현, 이은새, 장서영, 정희민, 최하늘, 황수연을 선정하였다.

이번 전시의 부제인 ‘액체 유리 바다’는 서로 다른 주제와 매체를 각자의 개성으로 다루는 참여 작가 9 명에게서 발견한 공통의 키워드이다. 이는 단어 사이의 틈새 같이 완결된 문장으로 매듭지을 수 없고 특정한 개념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동시대 한국 작가들의 자유롭고 유동적인 태도를 상징한다. 또한 단단하면서 섬세한 액정유리 같이 현실 안팎의 장면들을 더욱 투명하고 선명하게 반영하는 젊은 작가들의 성향과, 끊임없이 율동하는 너른 바다처럼 미래에도 멈추지 않는 흐름으로 존재하게 될 그들의 가능성을 의미하고 있다.

전시에서 소개하는 9 명의 작가들은 미디어의 이미지, 게임, 브이로그, 스마트폰 앱, 유튜브 등에서 발견한 특성이나 정서를 끌어들여 사회적인 이슈, 시대적인 고민과 정면 대결하기도 하고, 인터넷의 파도에 몸을 맡겨 함께 떠다니기도 한다. 또한 물질과 형태, 신체와 시간, 스크린의 내·외부 등에 대한 탐구를 독자적인 언어로 전개한다. 우리는 이번 전시에서 만나게 될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언제나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고, 힘겹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작가들의 의지와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바로 지금’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번 전시가 세대의 물결을 감지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소개 글

저는 사람들한테 소개를 할 때 조각가라고 소개합니다. 웹이나 인터넷 같은 것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면서 비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사람들에게 굉장히 많아졌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저는 지금 제 앞에 존재하는 물질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래서 저는 스스로를 조각가로 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I introduce myself to others as a sculptor. With stuff pouring out from the web and internet, there’s a heightened interest on things that are immaterial. This, however, led me to focus even more on matters that exist in front of me. At a certain moment, I began calling myself a sculptor.

물질을 제 앞에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상정하고, 그것을 제가 어떻게 가지고 놀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조각의 매체적 특징, 형식적인 내용, 혹은
내용적인 특징을 모두 포괄합니다. 하나의 주제에만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제가 늘 표현하는 방식이지만, 조각들을 가운데 두고 이것들을 둘러보면서 다른 것들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잠깐 그 조각의 위치에서 조각을 빼오기도 하고 그런 방식으로 작업을 확장시켜 가고 있습니다.

Assuming matters as something motionless, I think about how I can play and explore them. This goes for the nature of the sculptural medium, and its formal content and conceptual aspect. I expand my practice through different ways, such as putting the sculptures in the center, then observing them and integrating them with other things, or temporarily removing the sculpture away from its site.

이건 제가 유보하는 입장이긴 한데,예전에 저한테 비물질에 대한 불신이 솟구치고 있을 때 제가 유일하게 의지 할 수 있는 감각이 촉각이라 생각했습니다. 근데 그것이 어떤 말 그대로의 촉각적 감각이 아니라 그냥 내가 옆에 두고 만질 수 있는 행위의 안도감이 제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감각이었습니다. 모든 감각들이 이제 다 바뀌고, 모두 비물질화 될 때 제가 유일하게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감각이 촉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당시에 많이 했습니다.

An idea that I’m thinking about is that tactility is the only sense I can rely on when I felt really skeptical about immateriality. This touch of sense doesn’t literally mean ‘tactility’. There was a sense of relief in the act of touching something in front of me and it was the only sensation I can fully depend on. When all the senses have changed and everything has become immaterial, I thought, at the time, that tactility is the only sense I can rely and depend on.

자기만의 고유한 시그니처 양식을 갖춰야 된다는 압박을 받는데, 이를테면 어떤 작가 하면 어떤 작업이 이렇게 바로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중점을 두는 부분은 어떻게 나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할 수 있을지가 저한텐 더 중요한 문제고,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의 작업은 기존에 제가 미술사를 레퍼런스로 삼는 점과 조각 자체를 레퍼런스로 삼는 점에서 한가지 다이어그램을 더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살고 있는 동시대 한국, 서울입니다.

There’s a pressure for artists to have their own signature style, as if an image of an artist’s work should conjure up when you hear their name. What’s more important for me is how I can set aside my own territory, and in that sense, my work in this exhibition uses art history and sculpture itself as a reference but also another point of reference: Here and now in Seoul, Korea, where I live.

[초국가를 위한 내일의 원근법 모듈](2019) 하나의 군상, 하나의 세트 작업에 대해서 더 얘기를 드리면, 소실점 있고 그곳으로 진격을 하는 것이 어떤 진보의 상징이었는데, 저는 그 모델이 이젠 조금 시효가 끝나지 않았나 라는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그 때, 그와 동시에 서울이라는 도시가 개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그 원근법과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새로운 원근법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었고 내가 뚜렷한 수학적인 원근법을 계산해서 보여 준다 라기보다는 원근법이 하나의 상징으로 동원이 돼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국가의 다음 버전의 국가가 나온다면 어떤 원근법이 제시가 될 수 있을까. 그런 막연한 상상에서 시작을 하게 된 작업입니다. 원근법이라는 말이 쉽게 말해서, 과거에 내가 보던 방식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이 이번 전시의 (좀) 주요한 하나의 주제로 작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To elaborate on New Perspective (2019), which is a set of works, advancing towards a vanishing point used to be a symbol of certain progression. However, I feel that this model is somewhat outdated. I felt that this perspective doesn’t apply to Seoul as a city, both conceptually or symbolically. This work began by asking what other new perspective can be proposed for the city. This work doesn’t calculate and show a certain clear mathematical perspective. Rather, it begins with vague reflections on what perspectives would be proposed, if perspective is used as a symbol, and we arrive at a newer version of the state after this current state. I think perspective symbolizes the way I used to see things in the past. One of the important subjects in this exhibition is about how I can change my perspectives on things in the past.

여성 조각가들의 케어링이라고 하는 그 입장에 저는 굉장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조각 방식, 제작 방식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고민에서 저는 육아라는 방식을 동원을 해서 지속적으로 진행을 하고 있고 이번 작업에서도 등장합니다. 조각을 하나의 키워야 되는 대상으로 취급을 하는 (그런) 입장이 계속 드러나고 있고, 제가 일부러 (어떤) 명확한 명제를 잡지 않는 것은 ‘명확한 것’이라는 것에 불만이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저는 여기서 어떤 방식을 취할 수 있느냐 미술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저도 어떤 입장을 가져야 되는데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저는 이제 연기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I’m very impressed by how female sculptors take ‘care’ of their work. For me, contemplating on new sculptural methodology and techniques is very similar to constant childbearing, which is also evident in this work. I treat sculpture as a subject to be taken care of. I don’t hold onto a certain definite proposition because I’m pessimistic towards ‘things that are definite’. Then the question becomes what position I must take as an artist, and now, I use the word ‘acting’ to describe the position that I’m taking.

그래서 어떤 것들에 대해서 계속 (뭐,) 뭐 인 척하기, 어색하거나 이제 말이 안 되는 이미지를 계속 뻔뻔하게 재현을 하고, 가지고 오는 (그런) 상황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분명히 저것은 인간이 아닌데 인간처럼 대하고 있구나, 아니면 저거는 병풍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병풍이라고 뻔뻔하게 정의를 하는 방식을 사용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렇기 때문에 독해가 어렵습니다. 어떤 명확한 주장이라는 것은 없기에, 오히려 명확한 주장을 주는 것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미술이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술술 홀려서 설득시키는 게 미술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Therefore, I keep on creating situations where I shamelessly reenact images that pretend, or are awkward or even absurd. For example, I would treat something as a human being even though it isn’t, And define something that’s not a folding screen as a folding screen. This makes my work difficult to read. It doesn’t have any clear opinions. I’m not sure if I can say this, but giving a specific clear assertion is not what art should do. Rather, art is about smoothly enchanting and persuading people.

사진 | 홍진훤